책을 되새김질하다

관촌수필

대빈창 2020. 11. 25. 07:00

 

책이름 : 관촌수필

지은이 : 이문구

펴낸곳 : 솔

 

일락서산(日落西山) / 화무십일(花無十日) / 행운유수(行雲流水) / 녹수청산(綠水靑山) / 공산토월(空山吐月) / 관산추정(關山芻丁) / 여요주서(與謠註序) / 월곡후야(月谷後夜)

 

‘잘 있어라 옛 집, 마지막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한 번 옛 집을 돌아보았을 때, 그 너머 서산마루에는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가 있었다.’(54 - 55쪽) 책은 『현대문학』(1972. 5)의 「일락서산(日落西山)」에서 『월간중앙』(1977. 1)의 「월곡후야(月谷後夜)」까지 여덟 편의 중·단편소설을 묶은 연작소설집이었다. 소설도 읽는 때가 따로 있었다. 내 기억으로 소설집을 세 번 잡았다. 『창작과 비평』 영인본에서 「녹수청산(綠水靑山)」과 「관산추정(關山芻丁)」을 첫 대면했다. 어느 출판사인지 기억에 없지만 분명 단행본을 잡았다. 그리고 출판사 《솔》의 ‘이문구 전집’에서 『관촌수필』과 『우리 동네』를 손에 넣었다. 1997년 초판의 책을 두 번째 펴 들었다. 마음의 여유인 지, 묵은 연륜 때문인 지 활자가 크게 보였다.

30여 년 저쪽 영인본에서 읽었던 「관산추정(關山芻丁)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유일하게 고향을 지키는 죽마고우 복산이네 집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도시의 퇴폐적 소비문화의 하수구로 전락한 고향의 씁쓸한 농촌 현실을 그렸다. 복산이는 낫으로 베어 온 돼지꼴을 마당에 헤쳐 널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어느 날 옆집의 큰 돼지가 이유 없이 죽었다. 돼지를 해부하니 콘돔 한 뭉치가 뱃속에 뭉쳐 있었다. 어른들은 풍선인 줄 알고 콘돔을 불어대는 아이들을 밖에 내 보낼 수가 없었다. 씨알 굵은 유수지(留水池)의 물고기를 낚는 도시 밤낚시꾼들의 짓거리였다.

『관촌수필(冠村隨筆)』의 공간은 작가가 태어나 유·소년기를 보낸 충남 대천의 갈머리 마을(冠村)이다. 시간은 일제강점기 말부터 유신정권의 새마을 운동(1970년대)까지 30여 년이었다.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군사정권은 개발독재로 경제 부흥을 도모했다. 여기서 소외된 농촌은 빠르게 쇠락했다. 농촌 경제가 거덜나고, 가난에 찌든 농민들은 집과 농토를 버리고 도시로 이주했다. 농민에서 도시 빈민으로 편입되는 과정이었다. 작가 이문구(1941 - 2003)는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해체 위기에 몰린 농촌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렸고 풍자적으로 비판했다. 나는 4사성어(四子成語)로 구성된 여덟 편의 소제목을 보며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의 8가지 경치를 뜻하는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떠올렸다. 이 땅의 극악스러울 정도로 모진 현대사의 가슴 아픈 여덟 가지 장면처럼 여겨졌다.

이문구의 아호는 명천(鳴川)이다. 고향마을 관촌의 개울 이름을 빌려왔다. 뼈 속까지 시려오는 고통스런 작가의 집안 내력이 ‘여울물 소리’가 숨죽여 흐느끼는 것처럼 들렸다. ‘뿐만 아니라 세 고을(保寧, 舒川, 靑陽郡)의 지하당을 창설하고 이끌었던 책임자로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음에도, 매사에 지극히 의연하고 여유 있고 묵중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51쪽) 남로당 보령군당 총책이었던 아버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으로 학살되었다. 빨갱이로 몰려 둘째 형은 오랏줄에 묶여 살해되었고, 셋째형은 산 채로 대천 앞바다에 수장되었다. 중학을 어렵게 졸업한 그는 무일푼으로 상경했다. 건어물 행상, 도로 공사장 잡역부 등으로 어렵게 생계를 꾸렸다.

빨갱이 자식이라는 이유로 생명을 위협 받는 그는 늘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 그가 작가를 꿈 꾼 것은 필화(筆禍) 사건에 휘말린 시조시인 이호우가 문인들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나서였다. 작가가 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를 문학으로 이끌었다. 이문구는 우익 문인 김동리의 그늘에 들었다. 김동리는 이문구를 작가로 키웠다. 그는 제자의 문학관에 일체 간섭하지 않았고, 정권의 위협에서 제자를 보호했다. 이문구는 스승에게 평생 의리를 다하며 모셨다.

가장 먼저 잡은 작가의 책은 연희동 외국인 공동묘지 이장 공사판의 체험을 다룬 세로글씨 판형의 장편소설 『장한몽』이었다. 그리고 창비에서 나온 중·단편 소설집 『해벽』의 미군부대가 들어서며 한적한 어촌이 기지촌화되어가는 표제작이 인상적이었다. 눈길을 끄는 표지그림은 화가 시인 박상순의 디자인이었다. 소설에 걸 맞는 해설이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1945 - 2018)의 「소설 수필 시」였다. 마지막은 소설인 지 수필인 지 시인 지 아둔한 나로서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아무 구절(184쪽)을 떼어왔다 ‘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듬성이 솔수펑이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쇄쇗 쇄쇗······ 머리 위에서는 이따금 기러기떼 지나가는 소리가 유독 컸으며, 낄륵― 하는 기러기 울음 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마당 가장자리에는 가지런한 기러기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움큼씩 훔치며 달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