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양지바른 낮은 둔덕에서 후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다. 산자락의 여기저기 자리 잡은 농가들 사이 고샅을 따라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나들길 4코스 해넘이길 표지석이 서있었다. 사석으로 자연스럽게 쌓은 계단을 오르자 계단참에 일주문처럼 아름드리 밤나무가 양옆에 도열했다. 가을이 익어가며 밤송이가 아람을 벌려 밤알을 잘 손질된 잔듸에 떨구었다. 다시 계단을 오르자 왼편은 사철나무가 일렬로 도열해 묘역을 구획 지었다. 김장채소 텃밭을 마당으로 삼은 구옥(舊屋)이 석축에 등을 기대었다. 오른편은 고라니 방책으로 그물을 두른 텃밭에 고추와 들깨가 심겼다. 봉분에 밝고 환한 햇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묘 뒤편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처럼 가는 줄기 꼭대기에 솔잎을 매단 소나무 다섯 그루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서있었다. 멀리 서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일 것이다.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드넓은 골짜기 들녘을 감싼 능선은 진강산과 혈구산자락이었다. 묘역은 적막했고 쓸쓸했다. 그 흔한 석물 한 점 없었다. 내가 처음 접한 영재(寧齋) 선생의 묘는 20여 년 전 故 신영복 선생의 『나무야 나무야』에 실린 도판이었다. 무덤가에 어린 염소 한 마리가 고삐에 매였다. 강화도를 상징하는 인물의 무덤에 비석하나 없다니. 젊은 혈기였을까. 천둥벌거숭이인가. 앞뒤 가릴 것도 없이 나는 무덤가에 단출한 비석 하나 세워드리고 싶었다. 중고 지프를 끌고 몇 번 선생의 묘를 찾다 길눈 어두운 나는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2 - 1898) 선생은 할아버지가 개성유수로 있을 때, 개성에서 태어났지만 선대부터 살아 온 강화도에서 자랐다. 천연기념물 제79호 사기리 탱자나무 길건너에 영재 이건창 선생의 생가 명미당(明美堂)이 있다. 그렇다면 마을 사기리는 할아버지 이시원(李是遠, 1790-1866)의 아호 사기(沙磯)에서 유래된 것인가. 병인양요을 당해 조부 이시원은 명미당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생은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의 양대 천재로 이름을 드높였다. 또다른 이는 조선 초의 매월당(每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 - 1493)이었다. 선생은 양명학의 지행합일을 내세운 강화학파의 마지막 대학자였다.
문장가로 대표 저술은 『당의통략(黨議通略)』을 꼽았다. 파당과 족친을 초월하여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였다. 선생은 조선 후기 당쟁의 폐단을 지적한 비판적 지식인이었다. 특히 부정한 관리를 처단하는데 주저함이 없어 많은 존경을 받았다. 암행어사로 나가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의 구휼에 힘썼다. 선생의 발걸음이 미친 이 땅 곳곳에 선생을 존숭하는 백성들의 진심이 우러난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 1896년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세 번째 유배를 당하고 풀려난 후 고향 강화도에 칩거하며 서울에 발길을 끊고 지냈다. 그후 2년 뒤 47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의 묘를 도판으로 접한 후 세월이 많이 흘렀다. 섬을 일주하는 해안도로가 연결되었다. 강화도 구석구석 거미줄처럼 퍼진 나들길을 따라 사람의 발길이 이어졌다. 주문도행 도선(島船) 출항지는 화도 선수항이었다. 읍내에서 선창으로 향하는 지름길을 탔다. 선생의 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뜨였다. 영재(寧齋) 선생 묘역을 오르는 돌계단 쉴참 밤나무 그늘아래 점심을 차렸다. 코로나-19로 시절이 하수상하여 식당에서 밥 사먹기가 께름칙하여 차에 실어 놓은 도시락이었다. 환삼덩굴이 뒤엉킨 묵정밭에 쌓인 장작더미에 올라 선 새끼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배가 고픈 녀석이 냄새를 맡고 찾아왔을 것이다. 양념소스가 담긴 통을 녀석에게 내밀며 한걸음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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