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사람의 산
지은이 : 박인식
펴낸곳 : 바움
젊은 시절 한 때, 나는 등산잡지 월간 『사람과 산』을 정기구독했다. 산이 좋아서라기보다, 현실에 부대낄 때마다 도피처로 심산구곡深山九曲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어머니의 산’ 지리산의 품에 안겨 세상을 잊고 외롭고 쓸쓸하게 살고 싶었다. 망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한 나의 의지는 턱없이 미약했다. 박인식(69)은 산악계가 인정하는 뛰어난 클라이머였다. 그는 국내의 이름 있는 산과 암벽·빙벽을 모두 올랐다. 히말라야·알래스카·안데스·톈산·쿤룬 산맥과 파미르고원까지 그의 발길이 미쳤다. 박인식은 등산전문 월간 『산』의 기자였다가, 1990년 발행·편집인으로 월간 『사람과 산』을 창간했다. 잡지를 뒤적이다 이름 없는 출판사가 펴낸 책을 만났을 것이다. 초판1쇄의 책을 17년 만에 다시 손에 들었다.
책은 ‘山사람’으로 평생을 일관한 박인식의 산악 에세이로, 1부 ‘하얀 산과 하늘 사이’는 젊음을 산에 묻은 동료 산악인에 대한 헌사였다. 설악산 공룡능선에서 산화한 김혜경, 토왕폭 단독등반 추락사 송준호, 프랑스 알프스 샤모니 조난사 유재원, 에베레스트 원정 설악산 동계훈련 조난사 최수남. 2부 ‘젊은 알피니스트의 초상’은 산사나이들의 단짝과 맞수 편이었다. 아이거 북벽 정상의 정광식·남선우, 클라이머의 모암(母岩) 알프스 3대 북벽을 한국인 최초로 등반한 윤대표·허욱, 설악산 토왕폭의 맞수 에코의 유기수·크로니의 박영배, 제천 무암(霧岩)의 신비감에 끌려 암벽을 탄 세계적 알피니스트 허영호와 피의 냄새(?)에 끌려 산을 탈 수밖에 없었던 허정식, 한국 히말라야 벽 등반의 효시가 된 바인타브락 Ⅱ봉 정상의 우한규·임덕용.
3부 ‘산이 거기 있더냐’는 산사진의 일인자 김근원 선생, 山만 그리는 화가 김종복, 조계산 불일암의 수행자 법정스님, 설악산 권금성 산장지기 유창서, 설악산 희운각 임영수, 지리산 노고단 산장지기 함태식, 설악산 수렴동 대피소 이경수, 덕유산 향적산장지기 허의준. 4부 ‘붉은 바위산’은 한 발자국 못미친 정상에서 뒤돌아섰던 산쟁이들의 열전이었다.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 단독등정 후 하산하다 악천후로 조난당해 식량 없이 열하루 만에 무인지경 샹쥬앙 사막으로 생환한 손칠규, 에베레스트 최후관문 힐라리스텝에서 정상 40m를 남기고 산소가 바닥나 8,700m에서 산소 없이 빈 몸으로 비박한 후 생환한 1977년 1차 공격 박상렬 대장, 1982년 고줌바캉(7,646m) 초등자 김영한, 83년 산사태로 동료를 잃고 안나푸르나봉 C4에서 악천후로 눈물을 머금고 철수한 마지막 공격대원 여성 산악인 김영자, 76년 2월 에베레스트 원정 제3차 설악산 동계훈련 때 3명이 죽은 눈사태에서 자력으로 눈구덩이에서 기어 나와 두 명을 구하고, 79년 5월 북미 최고봉 매킨리 등정후 크레바스에 추락해 동료 두 명은 죽었으나, 혼자 살아 난 괴력의 사나이 박훈규.
5부 ‘환상의 얼음기둥’은 한국 최대의 빙벽 설악산 토왕폭에서 이름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산사나이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토왕성 빙폭 등반사는 한국 산악인의 계보를 잇은 족보였다. 산쟁이 박인식은 에필로그 ‘클라이머에게 고한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산정신이랄까, 산심山心이랄까, 그런 것이 어렴풋이 느껴지며, 그것이 나의 바닥을 이루고 있고 어쩌면 나의 영혼(영혼 물 한번 크게 먹었다)에까지 스며들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것을 보면 긍지와는 다른 것이지만 어디에 가더라도 나는 산쟁이임에 틀림없다.”(538쪽) 마지막은 내가 좋아하는 생태소설가 최성각의 표사이다. '광기어린 글로 산과 인간, 젊음과 죽음에 대한 가열찬 질문으로 일관한 그의 뜨거운 조사(弔辭)는 피처럼 선연한 그 순정성으로 인해 산에 생을 파묻은 이름뿐만 아니라 아직 살아있는 많은 산사나이들이 가슴을 흥분시키고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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