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이 끼치도록 무섭고 끔찍해 놀라 움츠러드는 느낌을 ‘섬칫하다’라고 합니다. 섬칫한 만남은 스무날 전에 있었습니다. 절기는 찬 이슬이 내린다는 한로(寒露)를 막 지나, 서리가 내려 겨울잠 자는 벌레는 모두 땅속으로 숨는다는 상강(霜降)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한글날로 시작되는 황금연휴의 마지막 날 오후였습니다. 늦봄에 캐 두었던 수선화 구근을 화계(花階)에 심었습니다. 호미로 굳은 땅을 헤집느라 맨발의 슬리퍼에 튄 흙을 씻으러 뒤울안 수돗가로 향하다가 녀석을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반찬거리 채소를 다듬거나, 손빨래를 할 때 앉는 깔방석에 1/3쯤 몸이 가렸습니다. 놈은 바닥에 고인 물에 삼각형 머리를 곧추세워 물을 들이켜고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요즘 시기가 독사의 독이 절정으로 메밀꽃 필 무렵이라는 자각이었습니다.
살모사(殺母蛇)는 출혈성 맹독을 지닌 이 땅에서 가장 무서운 독사입니다. 이름은 난태생(卵胎生)의 특징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새끼를 낳으며 기진맥진한 어미를 보며 조상들은 새끼가 태어나 어미를 죽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살모사는 우리나라 전역의 낮은 산이나 논, 밭에서 서식하며 수명은 대개 10 - 25년이라고 합니다. 녀석의 몸통은 짧고 굵었으며 눈 뒤로 흰 줄이 뚜렷했습니다. 맹독성을 상징하는 삼각형 머리를 세우고 놈은 10여분이나 물을 마셨습니다. 사람은 뱀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라 움츠러듭니다. 인류의 조상은 수백만 년 동안 동굴생활을 했습니다. 추운 계절이 닥치면 겨울잠을 자는 파충류와 동굴에서 동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오랜 기간 독사에 물려죽었던 공포가 인류의 유전자에 각인되었다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습니다.
주문도에 삶터를 꾸린 지 어느덧 15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시절 살모사는 흔하게 눈에 뜨였습니다. 봉구산자락 깊숙이 들어앉은 사무실은 사계절 햇볕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워 삼복에도 더운 줄을 몰랐습니다. 밤일을 마치고 여닫이를 밀칠 때마다 손전등으로 발밑을 살폈습니다. 살모사들이 흔하게 똬리를 틀었습니다. 사무실 뒤편 경사지에 석축을 쌓고부터 녀석들과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무더운 계절, 서해의 작은 외딴섬을 찾은 도시인들의 낭만이 때로 응급환자로 급전직하 합니다. 해변에서 놀던 피서객들이 밤중에 선창으로 나오려면 다랑구지 농로를 타야 합니다. 슬리퍼 차림으로 길을 걷다 몸을 덥히려 길가에 누운 살모사를 밟는 불행한 외지인들이었습니다.
“니는 사람을 잘 만나 목숨을 부지하는 구나. 어미와 자식이 똑같구나. 뱀도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니”
어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살모사는 자기의 강력한 무기를 믿고 사람을 만나도 절대 줄행랑치는 법이 없습니다. 물을 다 마신 녀석이 고개를 치켜들었습니다. 놈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가늘고 긴 막대로 녀석을 걷어 올려 잡풀이 시들어가는 묵정밭으로 던졌습니다. 녀석은 자기 의지대로 몸을 움직일 수 없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한동안 멍해 있었습니다. 나의 뜻을 눈치 챘을까요? 아니면 위험을 감지했을까요? 살모사가 서서히 잡풀 속으로 몸을 미끄러뜨렸습니다. 대기에 한동안 머물렀던 섬칫한 기운이 그제서야 흩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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