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바다와 술잔

대빈창 2021. 1. 27. 07:00

 

책이름 : 바다와 술잔

지은이 : 현기영

펴낸곳 : 화남

 

책을 잡는 누구나 쪽빛 표지에서 소설가 현기영(玄基榮, 1941 - )의 고향 제주바다를 떠올렸을 것이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나는 현기영을 세 손가락에 꼽았다. 78년 여름 계간지 『창작과비평』에 발표된 중편 「순이 삼촌」은 제주 4·3을 다룬 최초의 작품이었다. 소설은 서북청년단 출신 극우 경찰들의 제주 도민을 향한 반인륜적 학살을 민중적 시각에서 고발했다. 중단편소설집 『순이 삼촌』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초판을 찍은 지 한 달 만에 재판을 찍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유신정권의 보복은 졸렬했다. 소설가를 합수사合搜査 지하실로 연행했다. 그들은 잠도 안 재우고 삼일 간 고문하고, 작가를 유치장에 열흘 간 처박았다. 그리고 책을 판매 금지시켰다.

“나의 문학적 전략은 변죽을 쳐서 복판을 울리게 하는 것, 즉 제주도는 예나 지금이나 한반도의 모순적 상황이 첨예한 양상으로 축약되어 있는 곳이므로, 고향 얘기를 함으로써 한반도의 보편적 상황의 진실에 접근해보자는 것이다.”(173쪽) 197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아버지」부터 「순이 삼촌」, 「도령마루의 까마귀」, 「해룡 이야기」는 제주 4·3 항쟁이 소재였다. 장편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는 구한말 제주 민중 이재수의 난을 다루었고, 『바람 타는 섬』은 1931년 제주잠녀투쟁을 그렸다. 무려 13년 만에 펴낸 소설가의 두 번째 산문집은 모두 5부에 나뉘어 총 41편의 글이 실렸다. 본문에 실린 그림은 제주도 후배 화가 강요배의 작품이었다.

제1부 ‘인간과 대지’는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제주바다에 대한 은밀한 자기고백의 글이 실렸다. 표제글 「바다와 술잔」에서 폐결핵으로 죽은 첫사랑 소녀(성당 성가대, 세례명 마리아), 4·3항쟁의 정신적 외상으로 자살했던 고교 선배들, 알코올 중독으로 생을 중도하차한 두 친구와 고교시절 두 번의 자살시도(한겨울 죽으려고 용두암에서 수평선까지 헤엄치려고 바다에 뛰어들었고, 눈 쌓인 한라산 정상에서 홀로 하룻밤을 지낸) 어린 작가의 고뇌가 가슴을 쳤다. 그 시절을 회상하며 작가는 용두암 바닷가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술잔을 들어서 술의 수면을 쪽빛 바다의 수평선에 맞춘다. 술잔 속의 술이 바다의 쪽빛으로 물들고, 나는 그 쪽빛을 꿀꺽 들이킨다.”(30쪽)

제2부 ‘잎새 하나 이야기’는 5편의 엽편葉篇소설이 실렸다. 장승을 만들면서 힘겹게 무병無病앓이를 벗어난 미술선생 「세월 밖의 사내」, 이 땅의 묻지마라 갑자생의 수난사 「외주먹 아바이」, 6개월 임신 부부의 지리산 천왕산 등반 「정임의 발견」, 술에 얽힌 자전적 이야기 「실종」 그리고 신생의 이미지 노란색의 「봄병아리」까지. 3부 ‘상황과 발언’은 작가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19편의 명쾌한 칼럼이 실렸다.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민중교육, 색깔론·지역 감정을 판매하는 보수 언론, 파시즘의 부활 박정희 기념관, 미당 서정주의 친일·친독재, 9·11 테러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제노사이드 제주 4·3 학살, 국민의식의 식민화 영어 공용화론 등.

제4부 ‘말의 정신’은 작가가 문학적 배경으로 제주 4·3 항쟁을 다루면서 닥친 필화사건과 고향 제주도의 재발견에서 소설가의 문학적 원형질을 엿볼 수 있었다. 제5부 ‘변경인 커리커처’는 작가와 친한 7명의 예술인들에 대한 에피소드가 독자들이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군사파쇼의 폭압에 맞선 강골의 작은 사내 시인 신경림, 50편의 4·3 연작을 완성한 제주도 후배화가 강요배, 재입산을 꿈꾸는, 소설 『만다라』로 산문출송山門黜送 당한 소설가 김성동, 10년 연하의 망년우忘年友 시인 이재무, 시인 박철에 대한 글 「잃어버린 공동체의 꿈」을 접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장의 오래된 시인의 첫 시집 『김포행 막차』를 뽑았다. 그렇다. 시집의 발문이었다. 들풀·들꽃을 사랑했던 고교 문예반 2년 후배, 화가 강요배의 형이었던 故 강거배 불문학자, 친한파 일본의 진보·비판적 지식인 나카무라 후쿠치 교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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