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
지은이 : 황지우
펴낸곳 : 학고재
‘나는 빛이 희뿌염하게 새어 나오는 저 바깥을 향해, 벌레처럼, 더듬거렸다. 의식이 거의 퇴화하자 촉각만이 남았고, 뜻밖에도 그 촉각은 나에게 始原의 감각을 열어주었으며, 그때 내 손 끝에 물컹하게 잡혀 있는 것이 진흙이었던 것이다.’ 自序의 한 구절이다. 80년대는 詩의 시대였다. 대표시인으로 나는 단연 황지우를 손꼽았다. 시인의 시집들은 나의 책장 한자리를 차지했다. 시인은 90년대를 통과하면서 시를 쓸 능력이 고갈되었다는 생각에 고통스러웠다. 93년 6월 어느 날 전남 광주의 후배 조소방에 들렀다. 시인은 장난삼아 흙을 주물렀다. 느낌이 妙했다.
95년 5월 9일 ~ 21일까지 화랑 《학고재》에서 황지우 조각전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가 열렸다. 시인이 93년 6월부터 14개월간 빚은 조각 작품이었다. 전시회는 시인이 인체를 소재로 빚은 브론즈, 석고작품 20여 점과 신작시 10편이 함께 선보였다. 작품들은 대부분 고통 받고, 허물어져가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고통을 담은 시인의 시세계詩世界가 조형적 형상으로 구축된 것이다. 책은 도록 형식으로 꾸몄다. 사진작가 강운구, 김순신의 작품사진에 시인은 산문과 시로 작품을 해설(?)했다.
「老詩人, 처녀들 앞에서 벌겋게 웃다」는 장기수 서옥렬 선생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빚었는데, 시인 고은을 닮았다. 「地平線을 담은 상자」는 시인의 작업실이 있는 담양의 별서정원 鳴玉軒을 방문한 김지하 시인을 빚었는데, 미당처럼 보였다. 「거품을 게우며 흐르는 강」은 시인이 한때 몸담았던 황량한 산기슭의 한신대 앞을 흐르는 오염된 검은 강이 모티브였다. 「ZERO에 들어가는 저울」은 예술사 공부하러 독일로 가는 후배 시인 허수경과 떠난 화순 운주사 여행을 떠올렸다. 「海印」은 쭈그려 앉아 볼일 보는 달마를 형상화하며 고향 해남의 달마산 미황사 주춧돌에 새겨진 게를 떠올렸다. 「모래시계」는 혁명시인 김남주의 5·18 망월동 묘역으로 향하는 장례행렬과 명절날 온 식구가 모여 떡국을 먹는데 어머니가 동생에게 하신 말씀 “인공 때부터 좌익 머리 쓴 사람들 말로를 뻔히 다 봤는디, 너는 지금까지 헛살았어야”를. 시인의 아우는 인노련의 3대 두뇌(주대환, 노회찬)로 유명한 7년 동안 잠수를 탔던 노동운동가 황광우였다. 민주노동당시절, 광주에서 총선후보로 출마한 노동운동가의 형 황지우 시인은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책의 크기는 200*200으로 특별 판형이었다. 조각 작품과 시인의 산문, 시12편이 실렸다. 해설은 미술평론가 이영욱의 「저물면서 빛나는 삶-頌歌」와 조각가 박정환의 「시인의 절박한 점토 작업에 부쳐」로 마무리를 삼았다. 시인에게 작업실을 빌려 준 광주의 후배였다. 마지막은 표제시 「저물면서 빛나는 바다」(43쪽)의 전문이다.
물기 남은 바닷가에
긴 다리로 서 있는 물새 그림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서서
멍하니 바라보네
저물면서 더욱 빛나는 저녁 바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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