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우리 소나무
지은이 : 전영우
펴낸곳 : 현암사
한반도에 소나무는 중생대 백악기부터 터를 잡고 살았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민족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는 소나무였다. 수천 년 동안 소나무는 이 땅의 풍토에 적응하여 우리 민족의 문화, 예술, 종교, 풍수와 결합했다. 우리의 정신과 정서를 살찌우는 상징이었다. 조상들은 평생을 소나무와 함께 했다. 아이가 태어나면 잡인을 금지하는 소나무를 끼워 금줄을 쳤다. 땔감으로 솔가지나 솔가리로 구들을 덥혔다.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생활하고, 농경문화의 농기구와 생활도구를 소나무로 만들었다. 송홧가루로 다식을 만들고 솔잎을 깔고 송편을 쪘다. 송판으로 짠 관에 들어 뒷산 솔밭에 묻혔다.
소나무는 배를 만드는 조선재造船材였고, 궁궐을 짓는 국용재國用材였으며, 황장목黃腸木은 조선 왕실에서 사용하던 소나무 관곽재棺槨材였다. 신라시대부터 왕릉 주변에 소나무를 심었고, 민중들의 소나무 비보림裨補林은 마을숲이었다. 경기 광주 분원의 백자 가마의, 충남 태안 낭금갯벌의 전통소금 자염煮鹽을 굽는 소금가마의 땔감이었다. 일본 국보1호 교토京都 고류사廣隆寺의 미륵보살상은 양백지간(兩白之間, 소백산과 태백산)의 춘양목으로 만들어졌다.
『자산어보玆山魚譜』의 손암 정약전은 흑산도 유배 생활을 하면서 1804년 조선의 송금松禁정책을 비판한 『송정사의松政私議』를 저술했다. 전남 보성 북내면 이리에 1803년 시작된 현존하는 유일한 송계松契가 오늘도 이어졌다. 경남 통영 벽발산 안정사安靜寺는 조선 고종이 주지 한승스님께 하사한 금송패 3개, 인수印綬, 궤 등 금송패禁松牌가 전해 내려왔다. 소나무 벌목을 단속하고 감시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조선 왕실의 신분증이었다. 겸재 정선의 부채그림 〈고사의송관란도 高士倚松觀瀾圖〉의 나무는 경북 포항시 내연사의 비하대의 소나무였다.
천연기념물 제294호 수령 600년의 경북 예천 석송령石松靈는 세금 내는 소나무로 유명했다. 1920년대말 이수목李秀睦 노인이 1,215평의 대지를 소나무에 유산으로 물려주고 세상을 떠났다. 천연기념물 천연기념물 제180호 경북 청도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는 매년 삼월삼짓날(3. 3)이면 막걸리 열두말을 비구니 학승들에게 공양 받았다. 천연기념물 제103호인 충북 보은 정이품송과 강원삼척 준경릉 한국 제일의 미인송은 2001년 1월 8일 혼인을 했다.
‘남산 위의 저 소나무’로 불리어지는 우리 민족의 소나무가 이 땅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한반도의 등뼈 강원 백두대간의 산불과 ‘소나무의 에이즈’로 불리는 소나무재선충병, 지구온난화로 제주 한라산 영실靈室 소나무는 백록담으로 점점 쫓겨 갔다. 대기오염은 산성비로 소나무를 고사시켰다. 우리 산림의 60%를 차지했던 소나무 숲이 현재 25%로 급격하게 감소했다. 앞으로 50년 뒤에는 남한에서, 100년 뒤에는 한반도에서 소나무가 사라질 수 있다는 암울한 진단이 내려졌다. 산림학자 전영우는 우리 민족의 나무가 시한부 진단을 받았다는 안타까움에 이 땅 곳곳의 소나무를 찾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현석玄石 이호신 화백이 도반이었다. 3년 동안 전국의 주요 솔숲 29곳을 답사하며 소나무와 관련된 역사, 문화, 생태, 환경이야기를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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