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감의 빛깔들
지은이 : 리타 테일러
옮긴이 : 정홍섭
펴낸곳 : 좁쌀한알
死而不亡者壽 죽어도 잊혀 지지 않는 사람이 오래 사는 것이다
무위당 선생을 검색하다, 도서출판 《좁쌀한알》을 만났다. 2015년에 설립된 신생 출판사였다. ‘一粟子(좁쌀한알)’. 평생을 겸손한 삶으로 일관한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생명사상을 본받겠다는 의미로 출판사 이름을 지었다. 책은 스위스계 캐나다인 영문학자 리타 테일러(1941 - 2016)의 에세이였다. 영문학자는 한국에서 11년간 영문학을 가르쳤고, 이후에도 일 년에 몇 달씩 한국에 머물렀다. 글은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전통문화 그리고 친분을 나눈 한국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한국을 사랑한 벽안의 지식인은 한국 산천을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한국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 두 가지는, 하나는 한국의 친구들과 나눈 특별한 우정이고 다른 하나는 이 나라를 아름답게 꾸며주고 있고 내가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산이다.”(51쪽) 청도 운문사, 조계산 송광사·선암사, 팔공산 동화사·부인사, 가야산 해인사, 지리산 실상사, 경주 남산 칠불암에 발길이 닿았다. 미술가 이배의 ‘숯’작품과 갤러리 두모악의 제주도 사진작가 김영갑 그리고 도롱뇽 소송의 천성산 내원암 지율스님, ‘작은 학교’의 실상사 주지 도법스님, 〈21세기를 위한 연속 사상 강좌회〉를 꾸린 생태사상가 김종철을 만났다.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과 선량하고 성숙한 사람들과의 교분 그리고 불교와 무속신앙 등 한국 전통문화의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저자는 토건개발 국가의 속도전과 국민의식의 식민지화를 자초하는 영어숭배 등 세계화, 신자유주의라는 거센 물살에 휩쓸리고 있는 한국 젊은이들을 안타까워했다. “어떤 감은 나뭇가지 높은 곳에 언제나 남아 있다. 겨울에 새들이 먹을 것으로 남겨 놓는 것이 마을사람들의 전통이다. 인간세계를 갈가리 찢어놓는 탐욕과 대조되는 이미지로, 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앙상한 가지에 달려 있는 감의 모습은 희망을 준다. 그것은 베풂의 몸짓이자 생명의 몸짓이다.”(238쪽) 감나무의 까치밥에서 이 땅에 스며있는 생명사상을 읽어냈던 저자는 캐나다 밴쿠버 연안의 말콤 섬 소인툴라의 나무아래 영원히 잠들었다.
책과 사람의 만남도 어떤 운명이 작용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녹색평론》에서 펴낸 단행본을 대부분 소장하고 있다. 2009년 녹색평론사는 『Mountain Fragrance』라는 영어원본판을 출간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녹색평론 후원자, 정기구독자도 영문 책을 쉽게 손에 들 수 없을 것이다. 2017년 3월 8일은 저자의 1주기였다. 옮긴이 정홍섭은 『Mountain Fragrance』을 『감의 빛깔들』로 옮겼다. 마지막은 한국을 사랑했던 벽안의 지식인이 꿈꾸었던 삶이 잘 나타난 고려 말의 고승 나옹선사(1320 - 1376)의 선시禪詩 전문이다.
시리게 푸른 저 산은 내게 / 고요히 살라 하네. / 눈부시게 파란 저 하늘은 내게 / 맑게 살라 하네. / 탐욕 없이 / 화도 없이 / 바람처럼 / 흐르는 물처럼, / 살다 가라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