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나와 같다고 옳고, 다르면 그른 것인가
지은이 : 이지누
펴낸곳 : 알마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불화佛畵가 또 있을까. 아! 절터는 흑백의 농담이 빚어낸 한 폭의 찬란한 변상도였다. 형체도 형상도 없는 화엄이 펼쳐지는가하면, 어느새 그 자리에 선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었다가 또 튼튼한 꽃받침이 되어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가 펼쳐지는 것 아닌가. 그것은 마치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의 아름다운 문장이 그림이 나타나는 것만 같았다.’(27쪽) 보령 성주사터 탑비 전각 앞에 선 지은이가 황량한 절터를 삼킬 것처럼 몰아치는 눈보라를 묘사한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저자가 직접 촬영한 폐사지廢寺址 풍경은 글 읽는 사람이 현장에 서있는 느낌마저 들었다.
보령 성주사터 / 서산 보원사터 / 당진 안국사터 / 제천 사자빈신사터 / 제천 월광사터 / 충주 미륵대원사터 / 충주 숭선사터 / 충주 청룡사터 / 충주 김생사터
우리나라의 폐사지는 5,400여 곳이라고 한다. 이지누는 폐허라면 사족을 못 쓰고 툭하면 무너져버린 옛터를 방황했다. 그의 발길이 닿은 충청도의 절터 아홉 곳이었다. 남한강 유역의 절은 월광사, 사자빈사, 미륵대원사, 청룡사, 김생사이고, 바닷가의 사찰은 성주사와 안국사이며 산중 교통 요지의 가람은 승선사와 보원사로 구분될 수 있었다.
나의 발길이 머문 곳은 고작 3군데였다. 서산 보원사터, 당진 안국사터, 충주 미륵대원사터. 충청도 폐사지를 순례하는 저자의 화두는 ‘원융圓融’ 이었다.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을 잇는 사통발달의 교통요지에 자리한 충청도는 ‘대립과 공존’이 동시에 존재했다. 저자는 통합정신이 예술적으로 형상화된 유물로 보물 제104호 보원사터 5층석탑을 꼽았다. 석탑은 통일신라와 화려함과 안정감을 잃어버리지 앉은 채 고려 초기의 모습을 머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당진 안국사터를 찾으면서 석조여래삼존입상보다 배바위에 각자된 매향비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매향이란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를 묻으면서 미륵하생을 기원하는 의식이었다. 배바위의 향을 묻은 사실을 비장秘藏해 둔 각자刻字는 두 군데였다. 왼쪽 꼬리 부분은 ‘경술년 10월에 염솔의 서쪽 마을에 향목을 묻어두었다.’와 오른쪽으로 가운데 쯤 ‘경오년 2월 여미 북쪽 천구포 동쪽 가에 향을 묻었다. ’라는 내용이었다. 하늘재 대원미륵사터는 우리나라의 유이한 석굴사원에 모셔진 보물 제96호 석불입상에 끌려 발걸음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거대한 귀부의 등에 작은 새끼 거북 두 마리가 기어오르는 모습이 새겨져 절터를 찾은 이들의 미소를 자아냈다.
장담컨대 앞으로 나의 생에서 발길이 미칠 곳은 보령 성주사터가 될 것이다. 게으르고 아둔한 나의 성심은 거기까지일 것이다. 민속학자 주강현은 성주사터의 깨진 상호를 시멘트로 엉성하게 복원시켜놓은 민불民佛을 ‘매 맞을 대로 맞은 얼굴’이라며 그 처연함을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가장 처절하게 고통받을 때, 가령 실연을 당하거나 하면 성주사로 가라. 그것도 11월의 우중충한 날씨에 혼자서 가라. 돌아올 때면 ‘더 이상의 절망을 없다’는 위안을 받을 것이다.”라고.
저자의 전남 폐사지 답사기 『마음과 짝하지 마라, 자칫 그에게 속으리니』를 잡은 학습효과였다. 월악산 덕주사의 대불정능업신주비는 1987년 월광사터 입구 논둑에서 발견되었는데 범자梵字로 새겨졌다. 얼핏보면 표지그림은 범자처럼 보였다. 나 아我의 고古 문자였다. 표제는 그 유명한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인 성주사터 국보 제8호 낭혜화상 백월보강탑비의 문장에서 가져왔다. “대개 나와 같은 것을 한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르지는 않은 것이다. 마음을 편안히 가지고 생활하며, 교사巧詐한 마음을 버리는 것, 이것이 수도하는 사람의 행동에 가까울 것이다. 그 말은 분명하니 그대로 따르고, 그 뜻은 오묘하니 그대로 믿으라. 도道를 부지런히 행할 뿐 갈림길 속의 샛길은 보지 마라.”(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