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우리 동네

대빈창 2021. 3. 8. 07:00

 

책이름 : 우리 동네

지은이 : 이문구

펴낸곳 : 솔

 

2002년 대선에서 기적적으로 승리한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은 2003년 2월 25일이었다. 핍박받고, 고통받아온 자들이 그나마 마음의 위로를 받은 그날 밤. 한국 문학의 큰 산이 무너졌다. 명천鳴川 이문구(李文求, 1941 - 2003) 선생이 돌아가셨다. 모질고 극악한 이 땅의 현대사를 온 몸으로 감내한 선생의 죽음이 애달팠다. 고아아닌 고아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던 선생은 1961년 서라벌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그 시절 서라벌예대는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김구용이 강단에 섰다. 명천의 동기는 한국 문학을 풍성하게 일군 일꾼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박상륭, 조세희, 한승원, 이건청 등이었다.

출판사 《솔》의 ‘이문구 전집 7’로 출간된 『우리 동네』의 초판은 1996년 2월에 출간되었다. 눈에 띄는 표지그림은 화가 시인 박상순의 디자인이었다. 『한국문학』(1977. 1)의 「우리 동네 金氏」에서 『세계의 문학』(1981. 겨울)의 「우리 동네 趙氏」까지 아홉 편의 중·단편 소설을 엮은 연작소설집이었다. 해설은 문학평론가 진정석의 「이야기적 상상력의 힘과 아름다움」이었다. 우리나라 인구수가 많은 성씨姓氏의 순위는 김金, 이李, 박朴, 최崔, 정鄭, 강姜, 조趙, 윤尹, 장張 이었다. 소설의 주인공 아홉 개 성씨는 여기서 박朴과 윤尹이 빠지고, 황黃과 유柳가 얼굴을 내밀었다. 「우리 동네 黃氏」는 유일하게 부제 ‘으악새 우는 사연’이 붙었다. 각 편의 주인공은 한자 이름까지( )에 넣었다. 「우리 동네 柳氏」의 류석범만 한자를 붙이지 않았다. 류석범의 아내로 남묘호렌게쿄 신자면서 야쿠르트 아줌마 류그르트가 실제 주인공이었다.

아홉 편의 농촌소설은 1970년대 산업화·근대화로 무너져가는 농촌공동체의 풍속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우리 동네 金氏」는 오랜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논에 전기를 훔쳐 물을 대는 김씨와 한전 직원과 물 감시원과의 싸움은 민방위 교육으로 흐지부지되고 만다. 주인공 김씨는 민방위 교육에 시간 때우려 강단에 선 부면장의 되도않는 소리를 능청스런 입심으로 교육장을 웃음과 박수의 도가니로 만든다. 아녀자들의 관광 여행과 춤바람, 농민을 등쳐먹는 농협의 대부사업, 외식에 입맛들인 촌사람들, 엽사의 참새 사냥에 피해당하는 농가, 농산복합체 공장이 들어서면서 주민과의 갈등, 모내기 대민지원 고교생의 새참농성,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이용당하는 순박한 산골농민, 농협의 입맛에 놀아나는 보리수매, 농촌지도소의 영농교육에 대한 반감, 비료·농약회사의 거간꾼으로 전락한 농협, 농한기의 도박, 시골 구석까지 닥친 향락적 소비문화, 농촌아이들까지 전염병처럼 번진 크리스마스와 망년회, 널뛰는 땅값에 놀아나는 촌부 등.

책을 열면 작가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 5장이 실렸다. 90년대 중반, 고향으로 보이는 대천 겨울바다를 걸어가는 작가와『우리 동네』 연작을 썼던 70년대 경기 화성에서 살았던 작가의 시골집과 텃밭 그리고 마을 사람들과 설악산 관광을 떠나는 젊은 작가가 낯설었다. 이문구 소설의 특징은 누가 뭐래도 충청도 토속어의 입말을 자유자재로 능숙하게 구사하는데 있었다. 독자는 소설의 맛을 제대로 살리려면 책 말미에 붙은 민충환의 어휘·속담풀이를 뒤적여야 했다.

‘김이 어려서 몇 꿰미고 잡아 꿰거나 되들잇병이 미어지게 주워담았던 논두렁의 메뚜기며 밭이랑의 땅개비, 원두막의 사마귀와 콩밭머리마다 지천이던 잠자리들도 씨가 마른 지 오랜된 성불렀다. 쓰르라미도 개랑 건너 상수리나무 숲에서나 가야 볼 수 있었으니, 소금쟁이와 방개가 무논에서 사라진 동안이 여러 해 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목화 갈며 재 끼얹듯, 한 해 농사에도 무시로 농약을 들어붓다시피 해왔으니 무슨 천명을 타고났다고 배겨내겠는가.’(44쪽)

나는 이 구절에서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그 유명한 명제 ‘리얼리즘의 승리’를 떠올렸다. 소설은 『문예중앙』(1977. 겨울)에 발표된 「우리 동네 黃氏」였다. 우리나라에서 새로운 환경운동의 장을 열어 젖혔다는 〔공해추방운동연합〕은 1988. 9. 10에 결성되었다. 가뭄에 콩나기는커녕 눈에 띄지도 않는  이 땅의 생태소설을 찾아보려 그동안 얘썼던 헛힘이 떠오르며 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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