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불

대빈창 2021. 4. 1. 07:00

 

책이름 : 헤라클레이토스의 불

지은이 : 에르빈 샤르가프

옮긴이 : 이현웅

펴낸곳 : 달팽이출판

 

에르빈 샤르가프(Erwin Chargaff, 1905 - 2002)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나 빈 대학에서 화학을 공부했다. 1934년 히틀러의 나치 지배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컬럼비아대학교 의과대학의 생화학과에서 교육·연구했다. 오늘날 분자생물학의 기초를 세운 '샤르가프의 법칙'을 1949년에 발표했다. 1953년 크릭 - 왓슨이 DNA 이중나선구조를 밝혀내는데 결정적 실마리를 제공했다. 나의 뇌리 한 구석에 남아있는 그의 이름은 분명 고교시절 생물 시험을 준비하며 주입된 단답형 흔적일 것이다. 무려 40여년 만에 정기 구독하는 생태인문잡지 『녹색평론』(2019년 1 - 2월호)에 실린 「생명과학의 딜레마」를 통해 다시 만났다. 과학기술과 생명과학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을 담은 글이었다.

책은 ‘인간적 과학, 과학의 인간화’을 추구한 샤르가프의 전기적 에세이였다. 문학과 예술을 사랑한 폭넓은 인문 교양을 갖춘 자연과학자의 깊은 자기성찰적 사색을 담고 있었다. 샤르가프는 1970년대부터 유전자 조작으로 상징되는 현대과학의 상업성과 거대화를 비판하는 많은 에세이를 집필했다. 글은 3부에 나뉘어 38꼭지가 실렸다. 첫 꼭지 「하얀 피, 붉은 눈雪」은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자폭탄이 떨어진 지 30년이 지난 시점에 쓰였다. 20세기 근대과학을 온 몸으로 겪었던 샤르가프는 일본의 두 도시 이름만 들어도 극심한 공포가 몰려왔다. 인류 본성의 종말을 보는 듯한 묵시록적 시각에 사로 잡혔다.

오늘의 과학은 끊임없이 ‘죽음의 과학’으로 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에 직면하게 되었다. '작은 과학'은 사라지고 , 권위적인 정부기구가 운영하는 거대과학은 무한경쟁의 상업주의의 수렁에 빠졌다. 당대 어느 과학자보다 뛰어났던 샤르가프의 과학계의 타락과 무도를 질타한 혜안이 돋보였다. 그는 생각했다. "두 경우 모두, 그 바탕에는 핵 - 원자핵과 세포핵- 을 잘못 다룬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나는 두 경우 모두 침범하지 말았어야 한 장벽을 과학이 넘어섰다는 인상을 강하게 갖고 있다."(302쪽) 샤르가프의 두려움 섞인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2011년 3월 11일.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은 전세계를 방사능으로 오염시켰다. 폭발이 일어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은 방사능 오염수를 태평양에 무단 방류하고 있다. 일본이 오염에서 벗어나려면 앞으로 3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가야 했다. 중국의 헤젠쿠이 교수팀은 ‘유전자편집아기’를 출산시켰다. 생명공학 기술은 인간의 생명을 편집하고 창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의 태아가 다른 인간을 위한 재료로 생산되는 미래의 공장은 공상이 아니었다.

인간의 윤리적·도덕적 타락은 끝을 알 수 없었다. 샤르가프는 증언했다. “가능한 것이면 무엇이든 한다”는 악마적 교의惡魔的 敎義가 현대과학을 지배했다고. 그 전형이 핵분열과 생명조작 기술이었다. "달에 갈 방법을 알고 있는 사회가 자신들 내부의 인간성을 보호할 수단은 없었던 거야. 그리고 우주 탐사를 하는 동안 사회는 산산조각 분열됐고. 또한 화성의 생명체에 대해 추측하는 동안 자신들이 살아갈 수 없는 환경을 만들었어."(343쪽) 표제에서 만물은 생성유전하며 불멸의 근원으로 불을 상정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 - 480)를 떠올렸다. 표지그림은 시스티나 성당의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의 부분이었다. 신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 사이에 있는 작은 공간의 거리를 샤르가프는 ‘영원’이라고 불렀다. 과학의 오만이라는 유혹을 이겨낸 샤르가프의 인문학적 소양으로 나는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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