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삐릿

대빈창 2010. 7. 4. 09:23

 

 

책이름 : 삐릿

지은이 : 한동원

펴낸곳 : 실천문학사

 

촌놈들은 오랜만에 공항에 진출했다. 오거리 번화가에서 짜장으로 배를 불린 일행은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기 위해 어깨를 그들먹거리며 시장통으로 들어섰다. 강렬한 오후의 햇살을 하얀 타일이 튕겨내는 삼층건물의 마빡에는 세로로 공항예식장이라는 고딕체 상호가 붙어있었다. 지하계단 입구로 오소리잡는 청솔연기처럼 담배연기가 꾸역꾸역 배어나왔다. 해가 떨어지기까지는 이른 시간인데도 지하 홀은 입추의 여지없이 젊음의 열기로 빼곡하다. 낮은 조도로 인해 칸막이로 둘러싸인 테이블 군상들은 실루엣마저 뿌옇게 다가왔다. 나는 담배필터를 질근질근 씹으며 카운터에 비치된 메모지와 볼펜을 가져왔다. 그동안 갈고닦은 비장의 무기를 드러내 촌놈의 때갈을 벗어내고 싶었다. 'Riders in the Sky' 30년전의 한 젊은 치기스런 기억이 또렷하다. 밴드의 이름은 가물가물한데 곡명은 정확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당혹스러우면서도 자존심 상한듯한 DJ의 멘트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이곡을  들려 드릴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뮤직박스에도 없는 이 곡을 신청하신 분은 대단한 팝송 마니아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일주일 뒤 이 시간에 저를 꼭 찾아주시기 바랍니다. ' 나는 한 벽을 가득채운 LP판을 배경으로 유리벽 사이로 홀을 내려다보고 있는 DJ를 야려 보고는 공항다방을 벗어났다. 없는 것이 당연했다. 그 곡은 아직 라이센스로 발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DJ의 자존심도 대단했다. 세운상가의 빽판을 구했는지 어쨌는지 일주일도 안되어, 말발굽처럼 요란한 기타애드립이 전주를 장식하는 그 곡이 지하홀의 열기를 찢어버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먼저 정기구독한 잡지가 '월간팝송'이었다. 고교시절부터 20대초반까지 5년 동안 나는 발음기호도 헤깔리던 팝송에 미쳐있었다. 그시절 가공할 파쇼가 짖누르는 중압감에 사회적 분위기는 질식할 것만 같았다. 이에 젊음은 뜨거운 열기를  발산할 파열구를 찾아야만 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시절 나는 사회적 부조리를 알기도 전의 무조건적인 '이유없는 반항'인 것이 틀림없었다. 도시는 물론이고 한적한 시골 면소재지의 다방 한구석에도 여지없이 뮤직박스가 들어섰다. 할일없이 불쌍한 청춘가나 불러대며 젊음을 탕진하던 나는 DJ를 꿈꾸었다. 카세트를 끼고 살았다. FM방송의 팝송 프로들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 '김광한의 2시의 다이얼', '황인용의 영팝스' 그리고 전문 팝송마니아만 알아들을 수 있었던 '전영혁의 25시의 데이트'를 싸구려 연습장에 날마다 적었다. 모르는 곡은 월간팝송을 뒤적여 찾아냈다. 50여쪽의 A4용지 크기의 연습장을 나는 10권을 없앴다. 그러자 귀가 뚤렸다. FM방송 DJ가 멘트를 하기도전에 나는 밴드와 곡명을 먼저 메모노트에 긁적거릴수 있을 정도의 '광(狂)'이 된 것이다. 한편 잠깐동안 나는 귀머거리가 된 공포에 짖눌리기도 했다. The J. Gales Band의 Come Back에 미친 나머지 이어폰을 낀 채 볼륨을 최대한 올려 대여섯번을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고 이어폰을 벗자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는 이제 귀머거리가 되었구나 하는 공포에 얼마나 쫄았던가.

이 소설은 시인 친구 함민복이 권해서 손에 넣었다. '야 한번 읽어봐. 얼마나 골때리는 줄 알아.' 정말 재미있었다. 소설의 주인공 백동광의 우왕좌왕, 갈팡질팡, 좌충우돌하는 젊음을 보면서 나는 30여년 저쪽의 또다른 나를 떠 올릴수 있었다. 여기서 제목 '삐릿'은 마이클 잭슨의 공전의 대히트곡 'Beat It'을 가리킨다. 하긴 그시절 소풍때면 어김없이 '문워크'가 등장하지 않았던가. 이 소설은 한마디로 80년대 고교생 딴따라들의 행보를 그린 '메탈키드'의 성장소설이다. 하지만 록밴드가 '젊음의 반항', '기성 질서에 대한 도전', '자유로운 정신의 해방구'라는 도식적인 설정이 아닌, 젊음의 로망이었던 록마저도 기존 사회의 시궁창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으로 그려냈다. 맞는 소리다. 아무리 멋있었도 배를 곯리면서 할수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더군다나 자본주의 체제에서. 상업주의를 비난하지만 대중과 동떨어진 대중음악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책을 받고 얼마 후 택배에서 전화가 왔다. 낙도라 우편물을 받으려면 요금을 더 내야 한다고. 나는 대꾸했다. 선창 슈퍼에 맡겨 놓으라고. 며칠 지나 나의 손에 쥐어진 택배물은 책 구입에 대한 사은품으로 출판사에서 보낸 'Go Go 80's'라는 CD 두장이었다. 몇 곡 듣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나는 책장 한구석에 처박았다. 지금 다시 곡명을 일별하니 그럴만했다. 가볍기 그지없는 댄스뮤직이나 캔디팝, 아트락이 주종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한때 미치도록 락에 열광한 마니아답게 나는 헤비메탈이나 프로그레씨브 락 이외에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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