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지은이 : 정희성
펴낸곳 : 창비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우리가 저와 같아서/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일이 끝나 저물어/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나는 돌아갈 뿐이다/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샛강바닥 썩은 물에/달이 뜨는구나/우리가 저와 같아서/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년 문학사상에 발표된 이 시집의 표제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전문이다. 이 시와 나와의 인연은 십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매년 여름방학 철이면 4-H회원들의 심신수양 일환으로 야영대회가 열린다. 2박3일간 진행되는 대회에서 마지막 날밤 회원들의 친목을 단합하기 위해 봉화식을 갖는다. 캠프 화이어용 장작에 불을 지피기 위해, 높은 나무에서 4-H 상징 모형의 솜뭉치에 불을 붙여 내려 보낸다. 대회의 압권인 그 장면의 분위기 고조를 위해 솜뭉치를 내려보내기 전 남녀 대표회원의 시낭송 시간이 있었다. 그시절 4-H 담당선생은 나에게 선시(選詩)를 부탁했다. 그때 떠오른 시가 바로 '저문 강에 삽을 씻고'였다. 아마! 학창시절 창비 영인본에서 읽었던 시의 강렬한 인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음날 계면쩍은 얼굴로 그 친구는 다른 시를 부탁했다. 윗선에서 브레이크가 걸린 모양이다. 하긴 돼먹지않게도 신이니 영원이니 꽃의 아름다움이니, 영혼의 찬가니 음풍농월을 씨부렁거리는 알지못할 읊조림을 시의 본령으로 착각하고, 암울한 시대를 향한 분노를 빨갱이로 매도하던 좀비같은 의식의 소유자의 눈에는 당연히 그렇게 비쳤을 것이다. 나는 할 수없이 읍내 서점에 김용택의 '섬진강'을 부탁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모두 70년대의 작품이다. 유신정권의 쇠몽둥이가 판치던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억압당한 암울한 시대의 한 가운데에서 시인은 소외당한 삶에 대한 분노와 절망을 시에 담았다. 그러기에 70년대의 문학은 당연히 리얼리즘이 될수밖에 없었다. 시인은 문단에서 '선비'로 통한다. 시인은 철들고 난지 30년동안 고스란히 군사정권 아래 놓여있었다고 회고한다. 그 가파른 시대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시인의 시는 과작이 될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시력 30년에 고작 시집은 네권 뿐이다. 시인의 시대에 대한 정신은 서슬이 시퍼렇게 불꽃을 튕겼다. '다들 잡혀가서 죽고 하는데 혼자서 잘 살겠다고 대학교수 공부하는 것이 싫었던' 시인은 80년대 모교인 서울대 교수를 포기하고 평생을 고교에서 국어교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단아한 선비의 모습을 보였던 시인의 정신세계는 강철보다 단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