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제국 침략에 맞서 강화도는 고려의 39년(1232 - 1270년) 동안 전시戰時 수도였다. 강화도의 왕릉은 강화경江華京 시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강화도의 왕족 무덤으로 보이는 석실분은 모두 7기였다. 피장자被葬者가 밝혀진 무덤은 4기로 고려산의 홍릉(洪陵, 사적 224호)과 진강산의 석릉(碩陵, 사적 369호), 가릉(嘉陵, 사적 370호), 곤릉(坤陵, 사적 371호)이다. 가릉은 양도 능내리陵內里 진강산 자락에 있었다.
마을 이름이 말해주듯 능은 마을 안쪽에 있었다. 읍내에서 화도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면 가릉포 들녘을 앞두고 고갯길 좌측에 마을회관이 있다. 회관 안마당의 수령 200년 노거수老巨樹 느티나무가 찾는이를 반기듯 다가섰다. 나는 20여년 저쪽의 세월 강화도 답사를 하면서 가릉을 찾았다. 가릉으로 가는 길은 마을 고샅이었다. 세월은 흘렀으나 이리구불 저리구불 용트림하는 마을 안길은 그대로였다. 좁은 길에서 마주 오는 차가 보이면 한쪽에 얌전하게 비켜서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갈래길 모퉁이의 수령 100년의 느티나무가 능을 찾아가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고려 때부터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마을은 광산 김씨 집성촌으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마을은 변한 것이 없으나 가릉 주변은 단장을 새로 했다. 나의 옛 답사는 어설펐는지 모르겠다. 그 시절 보이지않던 가릉 뒤편 1시 방향에 피장자를 알 수 없는 인천시 기념물 제28호 〈능내리 석실분〉이 있었다. 무덤 뒤편을 나지막한 흙 둔덕이 둘렀다. 세월의 흐름에 형상을 알 수 없는 석수石獸가 무덤 뒤에 자리했다. 능의 옆과 뒤를 두른 난간석의 사라진 부재를 새로 보충했다. 새로 끼워 맞춘 화강석의 흰 빛이 이물스러웠다.
가릉은 고려 24대 원종(1219 - 1274)의 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외조부는 당시 최고 권력자 최우였다. 최우는 정실부인과의 사이에 외동딸뿐이었는데 그가 가릉의 주인 순경태후의 어머니였다. 순경태후 아버지 김약선은 당시 임금 고종의 권력 실세였다. 14세에 원종과 결혼하여 태자비가 되었고, 이듬해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충렬왕이었다. 아들을 낳은 다음해 병에 걸려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며느리를 위해 시아버지 고종은 대학자 이규보에게 「동궁비주애책문東宮妃主哀冊文」을 짓게 했다.
(······)적선이 모인 곳에 유전하는 꽃다움이 침체되지 않았다. 순하고 곱디고운 숙원淑媛은 유순하고 또 은혜로웠다. 난초처럼 빼어나고 옥처럼 고왔다. 동궁에 배필이 됨은 빈틈없이 맞는 일이었다. 마땅히 집안을 이어서 능히 영원히 전하리라 생각하였다. 어찌 그리도 복록이 없어서 홀연히 갔는가. 14세에 빈嬪으로 와서 16세에 가버렸다.(······)
가릉嘉陵은 고려 강조의 비 원덕태후의 곤릉坤陵과 함께 남한의 유이有二한 고려 시대 왕비의 능으로 돌방무덤이었다. 옛 답사에서 보았던 석물은 봉분 양옆에 몸뚱이는 묻히고 머리만 내민 석수 두 점 뿐이었다. 새 단장한 능역은 울타리로 경계 지었고, 비바람에 형상을 알 수 없게 두루뭉술해진 석수는 봉분 뒤에 자리 잡았다. 수문장처럼 능 좌우에 새로 시립한 문인석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가릉을 떠났다. 고려 사람들은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자리를 명당으로 여겼다. 무덤의 북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은 물이 흐르는 지역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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