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그곳에 묘가 있었다.

대빈창 2021. 3. 24. 07:00

 

 

20여 년 전 강화도 답사 때 나의 발길이 빗겨갔던 묘를 찾았다. 고려 말의 문인 충목공忠穆公 허유전(許有全, 1243 - 1323)에 대한 과문이 무덤을 찾아가는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었다. 불은면사무소 앞 삼거리 불은농협을 오른쪽에 끼고, 산골짜기 500여 미터를 구불구불 올라갔다. 길은 산중 깊숙이 파고 드는데, 근래 신축한 집들이 늘어섰다. 무덤은 골 깊은 산중에 자리 잡았던 것이 틀림없었다.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26호 허유전 묘 100m →〕 입간판이 더 이상의 산속 진입을 막았다.

돌로 포장한 완만한 경사면을 30여 미터 오르자 키 높은 홍살문 옆에 작은 비 〈허시중공묘소許侍中公墓所〉와 〈하마비下馬碑〉가 서있다. 사당으로 향하는 언덕길은 종친에서 세운 공덕비가 늘어섰다. 솟을대문 처마아래 현판은 〈화운문華雲門〉이었다. 열려진 문안으로 들어서자 한눈에 보아도 지극정성으로 가꾼 묘역이 드러났다. 대문에서 보면 오른편으로 사당 〈두산재斗山齋〉와 왼편으로 관리사가 봉분을 호위하고 있는 형상이었다. 기와를 얹은 낮은 돌담장이 구역을 경계 지었다.

묘역으로 향하려면 두산재 앞 판석길을 따라 사당을 왼쪽으로 돌아 뒤편의 키 낮은 〈신도문神道門〉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서야 했다. 봉분 하단은 특이하게 사각 형상이었다. 아랫부분은 발굴 당시 나온 돌로 복원했다. 묘를 두른 곡장도 그때 만들었다. 묘 앞에 표석 〈가락허시중駕洛 許侍中〉·문비석·동자상이 자리 잡았다. 세월의 비바람에 형상이 두루뭉술해진 동자상을 제외하고 모두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낮은 담장가의 문인석· 망주석, 귀부와 이수를 갖춘 비석도 이끼가 앉으려면 세월이 흘러야했다. 묘역의 석물들은 아직 생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고려 후기 문신 허유전은 1243년(고종 30년)에 출생했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했다. 여러 벼슬을 거쳐 충숙왕 때 가락군에 봉해졌다. 충숙왕 8년(1321년)에 수첨의찬성사를 지냈고, 정승에 올랐다. 이 해에 원나라 티베트(토번土藩)에 귀양 간 상왕(忠宣王)의 환국을 도모하려, 고령으로 민지閔漬와 함께 원나라로 향했다. 허유전은 당시 여든 한 살이었고 처도 늙고 병들었으므로 사람들이 만류했다. “사람은 모두 한 번 죽는 법인데 처가 병들고 내가 늙었다고 해서 어찌 우리 임금을 잊고 나만 편히 지내겠는가?” 라고 하며 아들에게 처의 병구완을 맡겼다. 마지막 작별을 하고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 아흐레 후에 결국 처는 죽고 말았다.

허유전의 23세손 허관구許官九는 강원 홍천에 거주하고 있었다. 1982년 당시 그는 30여 차례에 걸쳐 이상한 꿈을 계속 꾸었다고 한다. 파헤쳐진 할아버지의 묘가 나타났다. 잘 알지 못하던 예전 같은 동네 사람 오 씨가 나타나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형수가 흰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연달아 꾸는 꿈은 조상들께 무엇인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주말마다 1년여 동안 묘를 찾아 다녔다. 어느날 강화도 진강산 자락에서 오연봉의 무덤을 발견했고, 주변에서 허유전의 묘를 마침내 찾아냈다. 토요 미스테리 극장의 믿기 힘든 이야기에도 소개되었다고 한다. 그는 교직에서 물러난 후 묘 인근에 자리 잡고 조상의 무덤을 돌보았다.

고려 후기 대표적 문신 허유전의 무덤은 600여년 긴 세월동안 잊혀졌다. 묘는 도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80년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1988년 묘 발굴당시 고려청자 잔, 고려 토기, 얇은 청동 등 조각 수십 점과 중국 송·금대의 엽전 19개가 나왔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6호로 지정된 허유전 묘는 고려시대 봉토묘였다. 솟을대문을 나섰다. 묘역을 경계 지은 담장 너머로 올라올 때 보이지 않았던 낮은 봉분들이 눈에 뜨였다. 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의 봉분들은 뗏장도 제대로 입지 못한 헐벗은 무덤들이었다. 그렇다. 이곳은 한때 민초들의 매장지였다. 무덤 쓸 자리도 마땅치않았던 그들은 도굴당한 옛 무덤 곁에 망자를 묻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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