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강화경찰서 진입로에 〈황사영 생가터〉 입간판이 서 있었다. 나는 그때 먼지가 이는 비포장 길을 타며 황사영 백서사건을 떠올렸다. 황사영(1775 - 1801)은 다산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로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신유박해 때 충청도 제천 배론의 토굴에 은거하며 북경주교 고베아에게 보낸 비밀문서가 서울에서 압수되었다. 백서帛書는 한 자 크기의 비단에 작은 글씨로 13,311자를 적은 천주교 재건책이었다. 백서에서 문제가 된 내용은 서양 제국주의에 무력으로 포교를 요청한 대목이었다. 황사영은 1801년 11월 대역죄로 처형되었다.
비포장도로를 따라가자 경사가 급한 산자락을 깎아 앉힌 사당이 나타났다. 커다란 태극 문양의 솟을삼문과 담장을 현대식 블록으로 둘렀다. 한옥 기와집이거나 초가지붕의 생가를 연상하며 발걸음을 내디던 나는 어리둥절했다. 사당 좌측의 가파른 산비탈 위에 묘역이 자리 잡았다. 〈향토유적 제6호 황형장군〉 묘였다. 묘역을 에워싼 소나무 숲이 퍼붓는 폭양을 가려주고 있었다.
계절은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한다는 봄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상전벽해였다. 도로는 널찍하게 포장되었고, 묘역이 앉은 산자락 발치에 ‘강화산업단지’가 들어섰다. 높다랗게 입간판이 서있다. 〈장무공 황형장군 유적지 莊武公 黃衡將軍 遺蹟地〉 도로에서 한단 높은 석축 위에 앉은 사당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진입로 오른쪽에 연못을 새로 팠다. 종중재실宗中齋室 〈대상제 大上齊〉가 연못 건너에 자리 잡았다. 근래에 세운 공적비功績와 신도비神道碑가 사당 출입로 좌우를 지켜 섰다. 황형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의 현판은 장무사莊武祠였다.
묘역을 오르는 길의 아름드리 소나무가 장대했다. 용트림하는 소나무들이 봉분 뒤를 병풍처럼 둘렀다. 장방형 비좌에 투구형 이수를 갖춘 묘비의 글자는 '正憲大夫 工曺判書 兼 五衛都摠府 都摠管知訓鍊院事諡莊武公 黃衡之墓' 였다. 묘소 앞 넓적한 돌은 나의 짧은 식견으로 상석인지 혼유석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묘제를 지낼 때 제물을 올려놓은 상석이라면 받침돌 고석鼓石이 분실되었다. 영혼이 나와 후손들이 올리는 제수를 흠향歆饗하는 혼유석魂遊石이라면 상석이 분실되었다. 사악한 기운을 쫓는 벽사 기능을 가진 장명등長明燈과 향로를 올려놓은 향로석香爐石은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좌우로 시립한 홀을 든 문인석과 상주석에 돌이끼가 앉기 시작했다.
황형(黃衡, 1459 - 1520) 장군은 조선시대 무신으로 성종 11년(1480년)에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했다. 중종 5년(1510년) 삼포왜란을 평정하여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삼포왜란三浦倭亂은 부산포·내이포·염포에 거주하던 왜인들이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일으킨 난이었다. 무장한 왜인 수 천명이 부산포와 제포(내이포) 첨사를 살해하고 납치했다. 수백 명의 조선 백성이 살상되었다. 난으로 조선과 일본은 통교가 다시 중단되었다. 중종은 폭동을 진압한 공으로 장군 황형에게 연미정燕尾亭을 하사했다. 강화도를 대표하는 정자 연미정은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서해로 흐르는 절벽에 있었다. 황형은 중종 7년 함경도지방 반란을 진압하고 평안도·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 장무莊武를 받은 장군은 중종 15년(1520년)에 생을 마쳤다.
묘역을 벗어나 사당을 거쳐 연못으로 다가서는데 작은 우물이 눈에 띄었다. 황사영이 유년 시절에 사용하였던 우물이라는 팻말이 붙었다. 황사영은 황형 장군의 12대 손이었다. 내가 황형장군 사당을 처음 찾았던 그때, 문중에서 이곳을 찾는 천주교인을 위해 안내문을 붙였다. 황사영의 생가터는 양주군 부곡면 장흥리로, 묘는 그곳에 안치되었다. 시향도 그곳에서 거행하고 있다. 창원 황씨 문중은 한동안 난감했을 것이다.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릴 적 뛰어놀던 우물은 생가터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황사영은 유년시절을, 12대 선조의 무덤이 있는 이곳에서 보냈는가.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그 연유를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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