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홍릉의 입춘

대빈창 2021. 2. 15. 07:00

 

신축년 입춘立春 고려 고종 홍릉을 찾았다. 사적 제224호로 『고려사高麗史』에 홍릉洪陵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에 홍릉弘陵으로 표기되었다. 외포항에서 고려저수지 제방을 타고 고비고개를 넘자 좌측에 이정표가 서있다. 길가의 마을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서자 〈국화리학생야영장〉이 나타났다. 사람 그림자 하나 없는 야영장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출입구마다 쇠사슬이 입을 봉했고, 차량통제구역 바리게이트가 막아섰다. 붉은 글씨의 접근금지, 위험 팻말을 CCTV가 지켜보고 있었다.

야영장을 지나자 능을 향해 잘 손질된 돌계단이 나타났다. 능으로 향하는 길은 돌계단과 흙길이 번갈았다. 산비탈을 급하게 치 내려온 물길을 덮은 직사각형 돌들이 일렬로 가지런했다. 문화재를 다루는 세세한 정성이 고마웠다. 서리가 하얗게 내려 미끄러운 산길을 조심스럽게 걷는데 갈림길 우측에 뜬금없이 재실이 나타났다. 적지 않은 넓이를 차지하는 재실은 현판이 없었다. 마당을 둘러 싼 기와를 얹은 돌담장 너머로 맞배지붕의 전각 한 채가 단출했다.

고려는 고종 19(1232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를 개성에서 강화도로 천도했다. 최씨 무신정권이 몰락하고 몽골과 화의가 성립하여, 원종 11(1270년)에 개성으로 돌아갔다. 강화도의 임시 수도 기간은 39년으로 제23대 왕 고종(1213 - 1259)과 제 24대 왕 원종(1260 - 1274)의 재위 기간이었다. 고려산 남록의 급경사에 자리 잡은 홍릉은 고려궁터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홍릉은 고려 왕릉의 묘역처럼 원래 3단의 축대를 쌓았다고 한다. 각 단마다 제사를 지내는 정자각, 사람 형상의 조각, 그리고 왕릉을 배치했다. 3개가 남은 병석屛石을 모형으로 새 석재를 보충해 봉분 밑단을 둘렀다. 떠오르는 햇살에 하얗게 내렸던 서리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었다. 새로 앉힌 상석이 생경한 빛을 발했다. 날카로운 눈매의 문인석文人石 2쌍이 좌우에서 시립했다. 정자각을 바친 돌기둥의 흔적으로 보이는 4개의 키 낮은 석주가 한 구석을 차지했다.

묘역으로 오르는 돌계단 옆 작은 나무 팻말이 눈에 띠었다. 강화도 선비 고재형(高在亨, 1846 - 1916)은 1906년 강화도의 구석구석을 밟고 기행시문집 『심도기행沁都紀行』을 남겼다. 256수의 한시漢詩가 실렸다. 선비의 발걸음은 봄날 홍릉에 닿았다.

 

麗朝如夢鳥空啼    고려시대 꿈 같은데 새만 부질없이 울어대고,

春雨洪陵草色齋    봄비 젖은 홍릉은 풀빛이 가지런하네.

北望雲中松岳樹    북쪽의 구름 속에 송악산 숲이 있고,

猶自靑靑漢水西    절로 푸른 한강물은 서쪽으로 흘러가네.

 

고려 고종(1192 - 1259)은 1213년 제23대 왕위에 올랐으나, 최씨 무신정권의 꼭두각시였다. 세계 최강의 몽골 기마병과 거란의 3차 침입으로 국토는 쑥대밭이 되었다. 민초들은 집과 땅을 잃고 타국의 군대 말발굽아래 신음했다. 살아서 불운했던 왕은 죽어서도 불행했다. 1259년 6월 고종이 죽었으나 고려왕들의 무덤이 있는 개성의 송악산에 묻히지 못했다. 전시戰時 수도였던 강화도에 그해 9월 안장되었다. 왕의 전 생애는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 있었다. 팔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학생야영장은 군부대의 유격장을 방불했다. 두줄 잡고 계곡 건너기, 외줄타고 하강하기, 등판 오르기 등.  어린 후손들이 군사훈련을 받으며 내지르는 고함소리에 왕은 귀를 막았는 지 모르겠다. 홍릉의 봄은 언제 오는가.

'대빈창을 아시는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문도의 신新 관문關門 살꾸지항  (0) 2021.03.02
대빈창 길냥이 - 3  (0) 2021.02.22
뒷집 새끼 고양이 - 25  (0) 2021.02.02
겨울 안개  (0) 2021.01.25
겨울 산책  (0) 2021.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