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우리들의 유토피아
지은이 : 이승하
펴낸곳 : 새숲
내가 시인을 처음 만난 책은 시선집 『공포와 전율의 나날』 이었다. 시인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화가畵家 뭉크와 함께」가 실린 시집이었다. 시인의 등단작은 말더듬이 화법의 실험시였다. 뇌리의 잔영이 오래 남았는지 모르겠다. 인터넷을 서핑하다 출판사 《나남》의 ‘새숲 02’로 나온 시집을 만났다. 출판사는 경기 포천에 나남수목원을 가꾸었다. 표지사진은 황매화黃梅花였다. 봄이 무르익은 계절, 화원의 한 구석에서 초록빛 짙은 잎사귀 사이로 샛노란 꽃을 잔뜩 피우는 낙엽활엽관목이었다. 잎과 함께 피는 꽃은 색깔이 노랗고 매화를 닮았다.
‘새숲’은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알리는 ‘첫 시집’ 만으로 꾸민 브랜드였다. 시리즈에서 ‘01’은 아직 출간 전이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인의 첫 시집은 『사랑의 탐구』(문학과지성사, 1988)였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유토피아』(나남, 1989)는 두 번째 시집이었다. 시집 첫머리에 실린 자서 「실질적인 첫 시집 나의 20대, 그리고 1980년대」를 읽고서 곡절을 이해했다. 대학원 시절에 쓴 시를 모은 『사랑의 탐구』가 가장 먼저 출간되었다. 시인이 학부 시절에 쓴 시들은 『우리들의 유토피아』에 실려 두번 째로 나왔다. 시인은 30여년 만에 자신의 ‘첫 시집’의 얽힌 내력을 고백했다.
시집은 1부 ‘움직이는 도시’와 2부 ‘상황 시편’에 31편씩 62 시편이 실렸다. 해설은 문학평론가 조남현의 「인간다운 삶에의 목마름」이었다. 문학평론가는 “(시인은) 엄격한 자기통제에서 출발하면서 우선 상상력과 인식의 내용을 확정 짓고 나중에 이에 상응하는 형식상의 실험을 꾀했던 것처럼 보인다.”고 실험시를 논했다.
「육교 난간에 서서」는 단어 ‘낭떠러지’를 세로로 내려써서 가시화시켰다. 「1985년 제야」는 아랫줄에서 윗줄로 거슬러 올라가며 읽어야했다. 작중화자가 지하철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의 형상이었다. 「미로학습」을 읽으려면 미로처럼 시행을 가로·세로로 그려야 했다. 타락한 성문화를 비꼰 「헨리 밀러 씨와의 외출」은 사선斜線으로 읽어야 해독 가능했다. 「마네킹과 같은」은 띄어쓰기를 무시했다. 「어떤 리허설」은 두 개념이 사람처럼 대화하는 형식을 취했다. 「······」, 「?」는 문장부호로 제목을 삼았다. 마지막은 시행으로 벽을 쌓아 외부와 단절된 형상을 나타낸 「밀실」(121쪽)의 전문이다.
느닷없이사이렌이울리고온동네
수휴전 : 하던전쟁을얼마동안전
죄데 쉼깃
는은 쉬불
나않 는이
벽지 동삽
의르 안시
둠다 남간
어가 과에
고배은달배실밀의씩나하은북꺼
하못도가도오는나서에길행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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