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4를 지키려는 노력
지은이 : 황성희
펴낸곳 : 민음사
나는 시집을 손에 넣을 때 시인의 데뷔시집을 선호했다.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가 실현된 집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을 서핑하다 시인의 첫 시집에 실린 시 한 편을 접했다. 아쉽게 품절이었다. 두 번째 시집은 4부에 나뉘어 58편의 시가 실렸다. 각 부의 소제목은 부의 첫 시 제목을 따왔다. 해설은 문학평론가 박슬기의 「원본 없는 시대의 시 쓰기」였다.
첫 시집 『엘리스네 집』은 판타지를 통해 뒤틀리고 왜곡된 현실을 표현했다. 시의 진리성에 대한 철저한 냉소였다. 『4를 지키려는 노력』은 일상의 디테일이 시와 마술적으로 결합되는 순간을 모순어법으로 포착했다. 시의 진리성에 대한 알레고리적 비유였다. 시인 김기택은 표사에서 말했다. “겹겹이 촘촘하게 저장된 기억의 파일에서 꺼낸 일상의 디테일은 얼마나 마술적으로 결합되는가.”
장군께서는 한산섬 달 밝은 밤 지키던 칼로 / 내 질문의 유명무실함을 단번에 베어 주신다 / 가슴에 숨어 있던 붉은 사과들이 와르르 쏟아진다 / 의사께서는 내 약지의 한 마디 가볍게 잘라 내시곤 / 힘차게 짜낸 피로 이름 석 자 써 보도록 독려하신다 / 시간의 감옥에서는 그만한 하느님도 없다시며 / 리비도 들락거리던 심리학자께서는 / 어머니 입에 오줌 싸는 악몽으로 지친 나에게 / 의자를 이용한 108개의 체위를 권유하신다 / 물렁한 시계의 대중화에 집착했던 화가께서는 / 친구의 아내를 연모해 보라며 콧수염을 만지신다 / 이상향을 꿈꾼 의적께서는 호부호형 속에 모든 실마리가 있다며 / 율도국은 다만 허상이었노라 고백하신다 / 한때 다방을 운영하셨던 시인께서는 / 권태를 이기려면 난해는 기본이라며 / 불쑥 멜론을 내미시는데
「스승의 나무」(22 - 23쪽)의 3연이다. 문학평론가는 “지나온 모든 문학작품들을 복제한 복사본들을 만들어 낸 이 키치적인 시 쓰기야 말로 황성희만이 가능한 고유성”(114쪽)이라고 했다. 충무공 이순신의 「한산섬 달밝은 밤에」,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리비도 개념,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의 사생활, 허균의 『홍길동전』 그리고 시인 이상의 산문 「권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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