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원수리 시편
지은이 : 심호택
펴낸곳 : 창비
『하늘밥도둑』(창작과비평사, 1992) / 『최대의 풍경』(창작과비평사, 1995) / 『미주리의 봄』(문학동네, 1998) / 『자몽의 추억』(청하, 2005) / 『원수리 시편』(창비, 2011)
故 심호택(沈浩澤, 1947 - 2010) 시인의 1주기에 간행된 유고시집이었다. 네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은 다섯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 시인은 출판사에 시집 원고를 보냈다. 다섯 번째 시집에 실렸을 시편들이 1·2부의 60시편이었다. 3부의 44시편은 미발표 유고 30시편과 다섯 번째 시집에서 밀려난 원고였다. 3부에 나뉘어 104편이 실린 유고시집은 시인의 절친이었던 박경원 시인이 유고를 모으고, 발문 「쉬운 시의 미덕」을 썼다.
유고시집은 시인의 일상·학교생활, 문학 활동 사진 13컷과 「겨울 편지」 육필원고가 앞머리에 실렸다. 표제는 「원수제」(28 - 29쪽)의 각주를 보고 알았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 있는 저수지였다. 시인은 2003년 봄, 익산 시내의 아파트에서 여산면 원수리로 삶터를 옮겨 농촌생활을 시작했다. 한편 한편의 시는 자연과 이웃에 대한 더할 나위없는 애정의 눈길이 따뜻했다. 시편들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보편적인 사람살이의 깊은 의미를 담아냈기 때문이었다. 시인은 사람과 자연과 사물들을 따뜻한 애정과 환한 웃음으로 감싸 안았다. 「원기소」(107쪽)의 전문이다.
오구삼살방이라나 뭐라나 / 액운을 피하라는 점쟁이 말대로 / 나 어머니 따라서 잠시 / 대야라는 마을에 가서 살았다 / 닷새장이 서는 곳 / 그나마 대처라고 형편들이 나았던지 / 영양제를 먹는 아이가 있었다 / 외톨박이 나를 감싸주던 / 이중모라는 동무네 집 놀러갔다가 / 중모야, 원기소 먹어라! / 그런 말 처음 듣고 놀랐다 / 닭 속에 넣은 인삼이며 황기 따위 / 나도 인연이 없진 않지만 / 젊은 어머니 손에 그 고소한 걸 / 받아먹는 아이가 부러웠다
나는 김포 한들고개 고개마루 초가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황토흙 마당에 서면 서울에서 강화로 향하는 48번 국도가 한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어릴 때 말과 걸음이 늦되었다. 가난한 부모는 이른 아침부터 일을 나가 해가 떨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제대로 걷지 못하던 나는 배가 고파 엄마를 찾아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언덕길을 엉덩이 걸음으로 내려왔다. 언덕아래 사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선하신 분들이었다. 흙고물로 뒤덮인 지렁이같았던 어린 나를 할머니는 품 안에 안으셨다.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젊은 어미를 잡고 애를 죽일 작정이라고 혀를 차셨다. 가난한 어머니는 다음 날도 뙤약볕아래 김포 들녘에서 품을 팔았다. 보다 못한 할머니가 원기소 두 통을 구해 오셨다. 나는 늦은 나이에 원기소 기운으로 다리에 힘을 얻어 걸음을 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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