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마석 모란공원을 다녀오다 - 4

대빈창 2021. 7. 9. 07:00

 

이년 만에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민주열사묘역에 발걸음을 할 때마다 찌는 듯이 무더웠다. 나는 항상 모란공원 미술관 앞에 차를 주차했다. 정문 앞 꽃집의 문을 밀쳤다. 국화 10송이를 샀다. 시간은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길눈이 어두워 지난 참배 때 찾아뵙지 못했던 故 노무현 대통령의 봉하사저 건축가 정기용(1945 - 2011) 선생의 묘소를 찾아 나섰다. 모란공원 묘역은 넓었다. 나는 그동안 경춘국도변 정문 입구의 오른편에 자리 잡은 민주열사묘역에 참배했다. 모란공원 묘역 출입문은 세 곳이었다. 정문, 남문, 서문. 안내도의 정기용 선생의 묘소는 서문 초입에 있었다. 나는 다시 차를 끌고 달뫼고개를 넘었다. 한 시간여 서문 근처 묘소를 두리번거렸으나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이년 전에 이어 두 번씩이나 참배를 못하고 헛걸음을 했다.

선산처럼 눈에 익은 민주열사묘역으로 내려왔다. 봉분의 뗏장이 보기좋게 자리잡은 노회찬(1956 - 2018) 의원 묘에 헌화를 하고 눈을 감았다. 백기완(1932 - 2021) 선생의 묘는 전태일 열사 옆에 자리 잡았다. 화강암 자연석의 비석 앞면은 〈백기완 묻엄〉, 뒷면은 선생이 지은 「님을 위한 행진곡」의 첫 구절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가 새겨졌다. 낮은 봉분을 호석이 둥그렇게 둘렀다. 선생과의 첫 인연은 1992년 대선이었다. 그 시절 선생은 장산곶매가 상징이었던 기호 8번 민중후보였다. 가난한 〈진정추〉 동지들은 상계동 백화점 신축현장의 노가다로 적게나마 대선자금을 마련했다.

민주열사묘역의 가장 위쪽에 있는 1987년 6월 국민대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박종철(1965 - 1987) 열사의 묘로 향했다. 아! 박정기(1928 - 2018) 아버지의 묘가 아들과 나란히 앉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폭압적 국가권력에 목숨을 잃은 후 돌아가실 때까지 철저한 민주주의자의 삶을 사셨다. 부자의 묘소는 새롭게 단장되었다. 두 묘 사이에 새로 비석을 앉혔다. 동판의 그림은 고국의 산하를 배경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굳게 잡았다. 하단의 글귀는

 

하늘은 별을 기르고

땅이 사람을 내는 까닭을 이곳에 서면 깨달으리라.

이 땅 민주주의와 양심은 여기 두 부자에게 오래도록 빚졌다.

꼭 잡은 두 손에 산 자들의 뜻을 포갠다.

 

이소선(1929 - 2011) 노동자의 어머니를 뵙고, 통일운동가 문익환 목사(1918 - 1994)와 박용길 장로(1919 - 2011)를 뵙고, 조영래(1947 - 1990) 인권변호사를 뵙고. 민주열사묘역을 벗어나면서 정기용 건축가를 떠올렸다. (사)평화박물관추진위원회의 사무국장을 맡고있는 한홍구 역사학자가 선생의 부고를 알렸다. 무슨 사정인 지 그때 고인을 뵙지 못했다. 건축가는 수많은 건축물을 지었지만 죽을 때까지 자기 집 없이 31평짜리 전세 다세대주택에서 살았다. 생전의 고인은 자기 집은 100만평이라고 스스로 자랑했다. 북악산에서 뻗은 낮은 뒷산에서 종묘, 창덕궁, 후원과 낙산까지 눈 닿은데 까지 정원으로 삼았다. 선생은 유언 없이 이 말만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셨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너무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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