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수다쟁이 미식가를 위한 한국음식 안내서
지은이 : 황교익
펴낸곳 : 시공사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은 『자산어보』와 같은 정사正史에서 민간에 떠도는 야사野史, 전국 음식답사에서 만난 지역민들의 인터뷰까지, 비빔밥처럼 버무려 낸 풍성한 밥상을 독자에게 내밀었다. 바다와 뭍 먹거리를 아우른 오랜 세월 한국인들이 먹어왔던 그리고 앞으로 먹어갈 우리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책의 부제는 ‘생일날 미역국에서 장례식 육개장까지’였다.
한국인은 생일날 무조건 미역국이 밥상에 올랐다. 선조들은 미역이나 인간의 탄생 과정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연산 미역의 수정란이 바위에 붙는, 10월 말에서 11월 초에 미역바위 씻기를 했다. 날씨도 춥고, 바다가 거칠어지는 시기로 곤욕스런 노동이었다. 미역도 사람의 정성과 고통 속에서 태어났다. 한민족은 삼신할미상과 산모의 밥상, 또 매년 생일상에 미역국을 올렸다.
육개장은 ‘개장’에 ‘육肉’을 붙여 만든 단어였다. 육개장은 개장국 스타일로 끊인 소고깃국이라는 뜻이었다. 계절과는 관련 없이 개장국의 보신 이미지를 소고기 장국에 갖다 붙였다. ‘든든한 고깃국’이라는 이미지 확보였다. 소고기의 적당한 감칠맛에 고춧가루의 칼칼함, 대파와 마늘의 달착지근함, 그리고 고사리와 토란대의 안온한 나물 냄새가 따뜻한 국물과 어우러진 음식은 한국인의 삶에 너무나 익숙해졌다. 장례식장에서 육개장을 먹는 일에 어떤 의미도 없었다.
사람들은 흔히 ‘기호에 따라 음식이 결정된다.’(46쪽)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 주어진 음식에 따라 기호가 결정될 뿐이었다. 일본인은 명태를 안 먹었다. 그들이 일제강점기 명태를 쓸어간 이유는 명란 때문이었다. 명태 몸뚱이와 아가미와 내장, 이리가 남았다. 우리 민족은 이를 다 먹었다. 탕으로 먹고, 조려먹고, 젓갈을 담갔다. 가장 많이 남았던 것은 알을 거두고 난 명태 몸통이었다. 씻어 말린 것이 북어였다.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돼지고기 대일 수출이 본격화되었다. 일본은 돼지고기 전부가 아닌 안심과 등심 부분육을 원했다. 이 땅에 기름기 많은 삼겹살과 뼈에 겨우 살이 붙어 있는 갈비 그리고 족발, 머리, 내장 등이 푸짐하게 남았다. 현재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돼지고기 음식이었다.
통영의 충무김밥 할머니들은 창의적이었다. 보통 김밥은 여름철 한나절이면 금방 상했다.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할머니들 입장에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할머니들은 김밥 부패의 원인 김밥 속을 없애고 우리 입맛에 맞는 반찬을 내놓았다. 충부김밥은 그릇에 종이를 깔고 담았다. 충무 김밥은 원래 배 위에서 먹던 음식이었다. 종이로 그릇을 대신한 것이다. 그후 충무김밥이 식당 음식으로 변모했지만 배 위에서 먹던 음식이라는 기억이 무의식적으로 작동한 결과였다.
한국인들은 식당 종업원을 ‘이모’라고 불렀다. 1960년대 이후 한국은 더 이상 농업 국가가 아니었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급격한 산업화·도시화로 농민은 도시 변두리의 노동자가 되었다. 노동자는 자신의 먹거리를 직접 확보할 수 없었다. 농민이었던 그들은 밥을 사먹는 자체가 어색했다. 식당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음식을 사고파는 일에 대한 어색함이, 한 집안의 사람인 듯 호칭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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