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유물의 재발견
지은이 : 남천우
펴낸곳 : 학고재
서울대 물리학과 남천우(南天祐, 1932 - ) 교수는 2006년 24년 만에 교수직을 회복했다. 서울대 교원 임용은 65세로 제한되어 재임용은 불가능했다. 복직이 아닌 명예회복이었다. 그는 196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원자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17년차 부교수였다. 1982년 2월 서울대는 연구실적 부진으로 남천우 교수를 재임용에서 탈락시켰다. ‘교수재용제’가 도입된 후 첫 탈락자였다.
남천우 교수는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나기 전, 민주화를 바라는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에 서명했다. 그는 해임의 이유를 군사정권의 정치보복으로 생각했다. 물리학자는 국내 실험시설이 전무한 상태에서 핵물리학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는 과학사·고고학 분야에 자신의 능력을 쏟아 부었으나,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학교를 떠나있으면서 그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과 유물들에 대하여 종전에 밝혀내지 못한 새로운 사실(구조와 논리)들을 밝혀냈다. 책은 1987년 정음사에서 출간된 『유물의 재발견』개정증보판으로 학고재에서 1997년 12월 1쇄가 발행되었다.
석굴암石窟庵은 원래 석불사石佛寺라는 이름의 독립된 절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석굴 천장 앞쪽에 광창光窓의 존재를 제기했다. 소감실의 여덟 분의 좌상과 주벽입상의 네 분 보살은 불교의 12지연기十二支緣起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추했다. 신라의 월성터로 반월성半月城으로 불려지는 경주 인왕동의 왕궁터는 재성在城이라는 제2의 왕궁터였다. 첨성대는 정지整地 공사를 하면서 흙바닥을 돋아 기단석이 땅 속에 묻혔다. 그는 원래대로 복구할 것을 촉구했다.
조계사종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황수영의 고증으로 해제하여 이리저리 떠돌다가 2010년 원래 자리 용문사 상원사로 돌아왔다. 남천우는 조계사종은 삼국시대 구형 종의 형식(곧 고대 중국종 또는 오늘의 일본종의 형식과 동일한 형식)으로 신라시대 신형 종의 형식(곧 소위 한국종 형식)으로의 이행과정을 보여주는 국내 유일의 범종으로 보았다. 종의 여러 특징은 소위 한국종으로 신형식이 완성되기 직전의 작품이라고 주장했다. 황수영의 고증으로 세계 유일의 인공적 수중왕릉으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대왕암에서 그는 인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거북선은 특별히 따로 만들어진 배가 아니라 판옥선 갑판 위에 다만 덮개를 씌운 것이었다. 원래의 거북선에는 철갑이 없었으며 다만 목판 덮개 위에 쇠송곳을 많이 꽂았다. 저자의 학설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순신의 은둔설’이었다.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고, 70세까지 은둔해서 살았다는 이설異說이었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적탄에 맞았을 때 60명의 병사가 항시 있던 2층 갑판에서 측군 군관은 한 명도 없이 20살 남짓의 아들과 조카 둘이 장군의 임종을 지켜보았다는 장면. 장군이 사망했다면 바로 밑의 장수가 함대를 지휘해야 하는데 아들과 조카가 깃발을 흔들며 끝까지 지휘하는 비정상적인 장면. 충무공은 수많은 해전에서 야간에 싸운 일이 없었는데, 마지막 싸움 노량해전만 밤에 이루어졌다는 장면. 이전에 전투에 참가한 일이 없던 맏아들과 조카가 오직 이 전투에만 나섰다는 장면. 16년 뒤 장군은 기존의 묘에서 16m 떨어진 곳에 이장했다는 장면. 충무공은 선조로부터 극도의 미움을 사고 있어 전투가 끝나도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으로 은둔했다는 가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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