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

대빈창 2021. 11. 5. 07:30

 

책이름 : 나의 서양음악 순례

지은이 : 서경식

옮긴이 : 한승동

펴낸곳 : 창비

 

2020. 4. 27. 재일조선인 2세 서경식(徐京植, 1951 - )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잡고 책 리뷰를 블로그에 올렸다. 1971년 박정희 정권은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간첩단사건〉을 고문 조작했다. 서경식의 둘째 형 서승은 무기징역, 셋째 형 서준식은 7년형을 언도받았다. 재일조선인 가족은 고국의 감옥에 갇힌 형제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80년대초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식의 석방을 보지 못한 채 한 많은 눈을 감았다. 30대의 서경식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유럽 미술관의 그림과 조각을 순례했다. 치열한 시대적 사유와 서양미술 기행이 어우러진 『나의 서양미술 순례』(창비, 1992)였다.

나는 서준식의 『옥중서한』과 『서준식의 생각』을 앞서 손에 잡았다. 서승의 『옥중 19년』은 올 봄에 책갈피를 넘겼다. 군립도서관에 소장된 디아스포라 서경식의 책들을 섭렵하기 시작했다.『나의 서양미술 순례』나온 지 20년의 세월이 흘렀고, 서경식은 이순耳順의 나이가 되었다. 책은 음악이라는 예술이 어떻게 인간·사회·시대와 호흡해왔는지를 풀어냈다. 1992년의 미술 순례는 절망에 빠진 30대 백수가 홀로 감행한 독백의 여행기였다. 2011년의 음악 순례는 클래식음악모임서 만난 성악가 아내 F와의 동행기였다.

‘어릴 적 나는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중산계급의 표지標識고 교양 있는 가정의 표지였다.’(43쪽) 가난했던 어린 재일조선인 2세에게 클래식음악은 손에 닿을 수 없는 사치스런 음악이었다는 자기고백으로 글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예술을 알고 싶다는 열망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찾아왔다. 저자는 2000년부터 여름이면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잘츠부르크음악회를 찾았다. 책은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음악에 대해 품었던 복합적인 감정과 한없이 서정적인 에피소드들로 가득했다. 수많은 음악가와 연주자, 지휘자, 오페라 가수들이 등장했다.

가장 비중을 많이 차지한 음악가는 말러, 윤이상, 모차르트였다. 오스트리아제국 말기 유대인이었던 작곡가·지휘자 말러의 음악을 뒤늦게 이해하게 된 저자는 오스트리아 빈의 묘까지 찾아갔다. 말러의 음악은 그가 계몽주의의 자기모순을 껴안은 유대인이라는 존재였기에 가능했던 음악이라고 보았다. 박정희 정권의 〈동베를린 공작단사건〉의 간첩조작으로 고문, 투옥되었던 재독일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9 - 1995)은 ‘자신의 예술적 면모와 정치적 면모를 가장 높은 차원에서 통일시키려 했던 드문 천재였다.’(176쪽) 모차르트는 어릴적부터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녔고, 재능에 훨씬 못 미치는 작은 명성을 얻었을 뿐이다. 그는 병고와 빈궁에 허덕이다 서른다섯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장크트 맑스 공동묘지에 묻혔다.

책을 읽어나가다 나는 여기서  ‘의식의 정전현상’을 일으켰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1944년 봄. 프란츠 레하르의 〈유쾌한 미망인〉의 경묘하고 향락적인 선율이 흘렀다. 하인리히 힘러와 나치 친위대 한 무리가 음악을 경청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좋아한 오페레타였다. 작은 야외무대위의 오케스트라는 여성 수인으로 편성되었다. 지휘자는 1930년대 ‘빈의 왈츠 여인들’이라는 여성 오케스트라를 이끌던 알마 로제(Alma rosé)였다. 유대인 학살의 현장에서 경쾌한 행진곡을 연주할 수밖에 없었던 수인오케스트라에게 음악은 폭력이었다.

표지그림은 구스타프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1902)의 부분이었다. 부록으로 실린 글은 저자와 아내 F가 뽑은 ‘오페라 베스트 3’와 ‘성악과 관현악 베스트 3’였다. 『나의 서양음악 순례』는 나에게 서경식의 열 번째 책이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1981년 윤이상과 독일작가 루이제 린저와 대담집 『상처 입은 용』을 군립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살아생전 고향 통영 바다를 그리워하던 선생은 독일 베를린 가토우 공원묘지에 잠들었다. 이 땅이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는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열망한 죄(?)로 독재정권의 핍박에 타국에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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