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제79호 강화江華 사기리沙器里 탱자나무를 찾아가는 길은 사행蛇行 길이었다. 전등사 입구 사거리를 지나, 초지대교 방향으로 얼마 안가 삼거리에서 우회전했다. 해안남로는 길화교에서부터 인도가 없는 왕복2차선이다. 정수사, 동막해수욕장으로 향하는 길은 옛 신작로에 아스콘을 덧씌워 맞은편에 차가 보이면 조심스럽게 서행할 수밖에 없었다. 길가에 카페, 농산물판매점, 음식점이 즐비했다. 이른 시각인데도 차량이 제법 많았다. 야트막한 고개를 앞두고 오른편에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0호 영재寧齋 이건창(李建昌, 1852-1898)의 생가 명미당明美堂이 나타났다.
생가 출입을 막는 저지선에 차를 멈추었다. 마당앞 좁은 공터에 차를 주차하고 마당가 큰 나무로 향했다. 수고 10m, 나무둘레 1.8m, 수령 약 350년의 측백나무였다. 영재는 유년시절 두 그루의 노거수를 보며 꿈을 키웠는지 모르겠다. 도로건너 10시 방향에 탱자나무가 보였다. 탱자나무는 5월에 하얀 꽃이 피었고, 9-10월에 향기 좋은 노란 열매를 매달았다. 탱자나무의 줄기와 가지의 뾰족한 가시는 한 겨울에도 여전했다. 운향과에 속하는 교목으로 수형은 관목처럼 자랐다. 줄기가 항상 푸르러 상록수로 보이지만 낙엽성 교목이었다.
나무는 길가에서 들판으로 내려서는 버스정류장 뒤에 홀로 서있었다. 탱자나무는 1962. 12. 7.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6m, 뿌리근처 줄기는 2.3m 굵기였다. 수령은 400년으로 추정되었다. 시인 함민복은 화도 동막리의 허름한 농가에 10여 년을 살았다. 시인 집을 찾아갈때마다 길가의 사기리 탱자나무가 눈에 뜨였다. 볼 때마다 탱자나무가 안쓰러웠다. 오랜 세월 소금기 많은 바닷바람에 시달린 탱자나무는 기운 없는 줄기를 나무 곁의 큰 바위에 눕혔다. 줄기의 많은 부분이 썩어 들어갔다.
위 이미지는 9월 하순에 잡았다. 나무 울타리가 둘러졌고, 배수로가 잘 정비되었다. 흰 구름이 둥실 떠가는 푸른 하늘아래 황금빛 열매가 탐스러웠다. 사람들의 정성어린 손길아래 탱자나무가 회춘回春했다. 썩어 들어가는 줄기 부분을 덜어내고 충전재를 메워 보강했다. 탱자나무는 여러 차례의 수술을 겪고 용케 되살아났다. 오랜 세월 풍상에 시달린 끝에 한 쪽 가지가 죽고, 살아남은 가지가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탱자나무는 균형잡힌 모양새로 무성했고 늠름했다. 400년 세월의 온갖 어려움을 감내하고 의연하게 버틴 그 모습이 자랑스러웠다.
나는 탱자나무와 작별하며 영재寧齋 선생을 떠올렸다. 그는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매월당每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함께 조선의 양대 천재로 이름을 드높였다. 모든 벼슬을 거부하는 영재에게 고종은 최후통첩을 내렸다. “벼슬이냐, 아니면 유배냐” 영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유배를 택했다. 그것도 가장 혹독하다는 절해고도 고군산열도로 향했다. 한 겨울에도 날카로운 탱자 가시를 닮았던 영재의 기개가 그리운 시절이 되었다. 나는 마음 속으로 사기리 탱자나무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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