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스승의 옥편
지은이 : 정민
펴낸곳 : 마음산책
한문학 문헌에 담긴 전통의 가치와 멋을 현대의 언어로 되살려온 고전인문학자 정민鄭珉의 산문집을 『사람을 읽고 책과 만나다』, 『체수유병집』에 이어 세권 째 잡았다. 1부 ‘옛글의 행간’은 살면서 옛 글속에서 만난 잊지 못할 풍경 18꼭지, 2부 ‘세상 읽기, 삶 읽기’의 13꼭지, 3부 ‘생활의 발견’ 35꼭지는 살면서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와 삶 속에 숨어있는 문제점을, 4부 ‘책 읽기와 글 쓰기’는 선인들의 독서와 작문에 대한 가르침 11꼭지를, 모두 일흔일곱 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표제글로 가장 처음에 실린 「스승의 옥편」은 대학 시절, 스승의 책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기석 선생이 돌아가셔서 방문한 제자에게 사모님은 그 손때 묻은 책들을 맡겼다. 민중서림판 한한대자전은 하도 많이 찾아봐서 반 이상 말려들어갔다. 12책의 한화대사전도 손때가 절어 너덜너덜했다. 김도련 스승은 우리말 풀이 『논어』를 평생 읽고 또 읽었다. 서당 앞에 헌책을 가지고 와서 팔던 사람을, 어린 스승은 집까지 십여 리 길을 같이 걸어와서 책을 사달라고 졸랐다. 일제 말 공출로 끼니도 못 잇던 그때, 책값으로 어머니는 뒤주 바닥까지 쌀을 긁었다. 스승은 누더기가 된 『논어』를 어루만지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지금도 책을 뒤지면 뒤주 바닥 긁는 소리가 들린다고. 고전인문학자는 말했다. “학문에 길에 무슨 왕도가 있겠는가? 단순무식한 노력만 있을 뿐이다.”(17쪽)
70년대 팝송 한 곡이 끝났다. “참 좋죠! 이런 거보면 음악은 발전하는 게 아니라 변화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라는 진행자의 멘트 한마디에 상념은 이어졌다. 현대의 물질문명은 발전 속도가 너무 빨라 뒤쫓아 가기도 벅차다. 정신은 뒤처져서 헐떡거렸다. 작금의 문화가 짓는 표정은 요즘 아이들처럼 허우대만 멀쩡했다. 물질이 풍족할수록 정신은 날로 황폐해졌다. 안식년을 끝내고 미국에서 1년 만에 돌아오니 20년을 무던하게 들락거렸던 단골식당 〈월출정〉이 문을 닫았다. 시대는 이제 아무도 변치 않는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뜯어고치고 확 바꿀 궁리만 했다. 살아남으려면 변해야만 한다는 말은 슬프다.
독서讀書는 왜 하는가? 책 읽기는 단순히 활자로 된 책을 읽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들은 독서의 목적을 새로운 지식과 지혜의 습득에 있었다. 깨달음을 얻는 독서야말로 살아있는 독서였다. 당송팔대가의 영수 한유韓愈는 좋은 글을 이렇게 규정했다. “풍부하되 한 글자도 남아서는 안 되고, 간략하나 한 글자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豊而不餘一字, 約而不失一辭” 마지막은 이윤영(李胤英, 1714-1759)의 「붓을 꺽으며絶筆」(25쪽)의 전문이다.
高梧策策晩多說 오동나무 수런수런 저물녘에 시끄럽고
雨過西塘睡簟淸 비 지나는 연못가에 대자리 잠 해맑아라.
箇中有夢休傳說 이 가운데 꿈 이야기 남에게 얘기 마라
應入蓬山第一城 봉래산 높은 성에 응당 들어갈 터이니.
그는 위독해서 며칠째 말도 못했다. 앉아서 자다가 갑자기 이 시를 읊조리고 죽었다. 제목은 죽은 이가 마지막 남긴 시라 뒷사람들이 붙였다. 그의 나이 46세였다. 맑은 영혼의 소유자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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