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백두산 등척기
지은이 : 안재홍
옮긴이 : 정민
펴낸곳 : 해냄
독립운동가·항일 언론인 안재홍(安在鴻, 1891-1965)하면 나는 조선물산장려운동, 신간회, 조선어학회사건,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떠올랐다. 그의 신민족주의는 민족의 통합단결을 우선시하는 식민지 조선의 특수성을 고려했다. 계급혁명을 반대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함께 하는 새로운 이념이었다. 아호雅號 민세民世는 ‘민중의 세상’, ‘민족에서 세계로 세계에서 민족으로’의 뜻을 담고 있었다.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했던 민세는 9차례에 걸쳐 7년3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8년의 신문사 재직동안 사설 980편, 시평 470편을 집필하는 놀라운 필봉을 휘둘렀다.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는 그가 49세 되던 해인 1930년 7월23일 밤 11시에 경성역을 출발하여, 8월7일 오후 5시 기차로 북청역을 떠나기까지 16일 간의 백두산답사기였다. 백두산 답사는 서울을 떠나, 원산 / 주을온천 / 무산 / 동사동 / 무봉 / 신무치 / 무두봉 / 분수령을 거쳐 백두산 천지에 오르고, 허항령 / 포태리 / 가림리 / 혜산진 / 풍산 / 북청을 거쳐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답사기는 8월11일부터 9월15일까지 총 34회에 걸쳐 사진과 함께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1931년 6월, 유성사流星社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서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여행은 한가한 일이 아니다. 높은 산에 오르고 한바다에 떠서 천지의 드넓은 기운을 마시면서 웅장하고 아득한 기상을 기르는 것은 그대로 세상에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5쪽) 민세가 남긴 백두산 발자취는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의 마지막 현장 고증이 되었다. 비는 조선과 청국의 경계를 표시한 비석이었다. 1712년(숙종 38)에 청의 오라총관 목극동과 조선 관원들의 현지답사로 세워졌다. 백두산정계비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 소실되었다. “깎아지른 벼랑에 곧바로 쏘이는 태양이 찬란하고도 영롱하게 수면으로 광선을 내려놓아 빠른 바람에 주름 져 퍼지는 물결이 가볍게 밀릴수록 천변만화의 색태가 드러난다.”(95쪽) 민세는 천지天池를 이렇게 묘사했다.
고전인문학자 정민은 『백두산등척기白頭山登陟記』를 풀어 읽기 위해 원칙을 세웠다. “내용은 빼거나 보태지 않는다. 한자말은 풀어쓴다. 긴 글은 짧게 끊는다. 구분은 현대어법에 맞게 바꾼다. 한 문장도 남김없이 다 바꾸고 하나도 빠뜨림 없이 그대로 실었다.”
"갓모봉과 설령雪嶺등 여러 산에까지 웅대하고 장려하게 둘러선 한 중간에 무진장으로 펼쳐진 창창한 대수해가 온통 푸르게 만경萬頃이나 한결같이 쭈욱 늘어서서 빼곡하고 엄숙하고 아스라하고 아마득하며 거침없고 유유하고 신비하고 고요하다. 그윽하고 깊숙하고 웅장하고 장대하며 순후하고 거대함이 말로는 다할 수가 없고 형용하기가 어렵다."(76쪽)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갓모峯 雪嶺等 諸山에까지 雄大壯麗하게 擁立된 한 中間에 無盡藏으로 展開된 蒼蒼한 大樹海가 一碧萬頃 純一히 쭉 늘어서서 森森肅肅渺渺茫茫하고 蕩蕩悠悠玄玄寂寂하야 幽僻深邃雄遠하고 壯麗敦厚洪大함이 言語에 끊어지고 名像키 어려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