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대빈창 2021. 12. 28. 07:30

 

책이름 :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

지은이 : 서대경

펴낸곳 : 문학동네

 

인터넷을 서핑하며 많이 읽히는 시집을 찾았다. 낯선 시인의 시집 표제가 인상적이었다. 서대경은 2004년 『시와 세계』로 문단에 나왔다.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는 8년 만에 내놓은 첫 시집이었다. 내가 잡은 시집은 2019년 9월 1판 7쇄였다. 1부 ‘소박한 삶’에 13편, 2부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에 13편, 3부 ‘차단기 기둥 곁에서’에 15편, 모두 41편이 실렸다.

시인 김안은 발문 「자네는, 나는 우리는 여전히 백치이고 백치일 테니」에서 “시라는 장르가 가지고 있던 말의 압축성을 파기하고, 소설적인 문체와 장문의 문장을 쓰는 이유는 바로 그것들의 단속적인 말과 기억을 완벽하게 되살리기 위해서가 아닐까”(114쪽) 말했다. 시편을 읽어나가며 나는 엽편소설葉篇小說을 읽는 착각이 들었다. 시편들은 꿈과 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몽환적인 이야기 시였다. 연과 행의 구분 없이 산문처럼 쓰인 시들에서 시와 소설의 경계를 찾을 수 없었다.

표제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는 1부의 마지막시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의 6연과, 2부의 마지막 두 번째 시로 표제시인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의 3연에 등장했다. 시인은 말했다. “우리의 내면이란 사실 외부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나의 존재에 대해 절대적으로 무지하며, 근원적인 의미에서 나의 욕망도, 나의 의식도, 나의 언어도 온전히 나의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나에게 영원한 타자他者에 불과하다.”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 차디찬 두 개의 손이 내 안에서 내 입을 벌렸고 그것은 곧 타일 바닥에 무거운 소리를 내며 떨어져내렸다 그것은 형광등 불빛을 받아 검게 번들거렸고 세면대 아래 배수관 기둥을 붙잡더니 거울이 부착된 벽면 위로 재빠르게 기어올라갔다 나는 술 깬 눈으로 온몸이 짧은 잿빛 털로 뒤덮이고 피처럼 붉은 눈을 가진 그 작은 짐승의 겁먹은 표정을 바라보았다 나는 외투 속에 원숭이를 품었다 그것은 꼬리를 감고 외투 속주머니 안에 얼굴을 파묻은 채 가늘게 몸을 떨었다

 

「가을밤」(30-31쪽)의 1연이다. 시인은 어느 가을밤 동네 피시방에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달빛이 환했고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왔다. 시인은 내면의 원숭이가 떠올랐고, 화장실 거울을 통해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컴퓨터 모니터 앞으로 돌아와 시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가을밤 나는 술집 화장실에서 원숭이를 토했다’라는 첫 문장을 썼다. 줄줄이 글이 쏟아져 한 편의 시가 금방 완성되었다고 한다. 자정이 넘은 시각의 피시방은 담배연기로 뿌옇다. 의자에 기대 잠이 든 사람들, 헤드셋을 낀 채 게임에 열중한 사람들, 야식으로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 그 혼돈의 공간에서 시인은 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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