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침묵의 세계

대빈창 2022. 1. 19. 07:30

 

책이름 : 침묵의 세계

지은이 : 막스 피카르트

옮긴이 : 최승자

펴낸곳 : 까치

 

독일의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Max Picard(1888-1964)의 명구가 떠올랐다. 그가 쓴 『침묵의 세계』Die Welt des Schweigens(1948) 말미에 나오는 글귀다.

 

“살아 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서 침묵을 찾는다”

 

건축가 승효상의 「침묵의 도시」(『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돌베개, 2016)의 112쪽의 글귀다. 나의 책장에 몇 권의 책이 쌓여있는 건축가가 깊은 깨달음을 얻은 막스 피카르트의 책 두 권을 손에 넣었다. 「침묵의 잔해」(『침묵의 세계』, 245쪽)에서 인용된 글이었다. 건축가는 말미에 나온 글귀라고 했으나, 내가 잡은 책(3판 8쇄, 2019)은 마지막에서 다섯 번째 꼭지의 한 문장이었다.

책의 헌사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한다”는 Marea-Culm 사원제단에 새겨진 글로 괴테의 일기에서 뽑았다. 추천글은 프랑스의 실존주의 찰학자·희곡작가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9-1973년)의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에 대하여」였다. 막스 피카르트는 인간의 지평에서 만나게 되는 침묵의 리스트를 32꼭지에 나뉘어 제시했다. 첫글 「침묵의 모습」의 첫 단락(19쪽)이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인 완전한 세계이다. 침묵은 그야말로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위대하다. 침묵은 존재한다. 고로 침묵은 위대하다. 그 단순한 현존 속에 침묵의 위대함이 있다.

 

일찍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마른 빵에 핀 곰팡이 /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힌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일찌기 나는」의 1·2연이다. 한국 현대시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자기만의 시어를 확립했다는 평을 받는 시인 최승자가 글을 옮겼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한국어판은 가장 뛰어난 임자를 만났다. ‘시인들의 언어 속에서만은 이따금씩 침묵과 연결되어 있는 진정한 말이 나타난다.’(46쪽) 가브리엘 마르셀은 책을 공감하지 않는 독자들에게 공허한 말들의 무의미한 나열로 치부될 위험이 있다고 했다. 책을 단번에 읽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인지도 몰랐다. 나는 시를 읽듯 곱씹으며 천천히 책갈피를 넘겼다. 저자의 의도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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