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대화

대빈창 2022. 1. 28. 07:30

 

책이름 : 대화

지은이 : 리영희·임헌영

펴낸곳 : 한길사

 

‘실천적 지식인’ 리영희는 일제강점기 1929년 평북 운산에서 태어났다. 일본 군국주의 광기가 극단으로 치닫던 1942년 경성공립공업학교에 들어갔다. 가난한 월남민 리영희는 무상으로 배울 수 있었던 국립해양대학교에 들어갔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유엔군 통역장교로 입대했다. 1953년 정전협정 후에도 리영희는 4년을 더 군대에 잡혀있었다. 미8군 사령관을 비롯한 미국 고위 장교들의 통역을 하며 리영희는 미국의 실체를 들여다보았다. 국가 이기주의를 앞세우는 제국주의였다. 한국군은 미국의 용병일 뿐이었다.

1957년 7년 만에 군대에서 풀려 난 리영희는 합동통신사 기자로 언론에 발을 디뎠다. 외신부에 근무하며 제3세계 민중들의 반제국주의 해방투쟁과 미·소 냉전의 국제관계에 주목했다. 이승만 정권의 실상을 연속 칼럼으로 〈워싱턴 포스트〉지에 익명으로 기고했다. 4·19혁명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섰다. 1년 만에 박정희 군부쿠데타로 한국 사회는 다시 암흑천지가 되었다. 리영희는 1964년 조선일보사로 옮겼다. 제1차 필화사건은 반공법 위반 협의로 한 달 남짓 구속됐다. 제2차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남한과 북한을 함께 초청하고 남북의 동시 유엔가입을 추진한다는 기사를 쓴 죄(?)였다. 1960년 중반 선생은 외신기자로 베트남전쟁의 반제국주의 해방투쟁의 본질을 밝혔다.

1969년 리영희는 조선일보사에서 쫓겨났다. 합동통신사로 돌아왔지만 1971년 ‘64인 지식인 선언’으로 길거리에 다시 팽개쳐졌다. 다행히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자리가 났다. 1974년 첫 책 『전화시대의 논리』가 나왔다. 진실에 목말라하던 이 땅 젊은이들의 갈증이 풀리기 시작했다. 선생의 글은 국가권력이 오랫동안 심어놓은 극우반공주의의 장막을 찢어발겼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은 그를 교수직에서 쫓아냈다. 곧이어 유신체제의 우상을 부수는 『우상과 이성』이 출간되었다. 젊은이들에게 각성의 빛을 밝혀 준 그에게 ‘사상의 은사’, ‘의식화의 원흉’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1977년 리영희는 혹독한 신문을 당하고 반공법 위반으로 2년 여 동안 감옥에 갇혔다. 한번 터진 진실과 자유의 물결은 되돌려질 수 없었다.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 투쟁에서 선생의 글은 변혁운동의 엔진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선생을 광주학살 전야에 다시 체포해 남산 지하에 가두었다. 1988년 5월15일 〈한겨레〉 창간호를 집어 든 선생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다음해 선생은 한겨레 창간 북한취재기자단 방북기획으로 다시 구속되어 160일 만에 풀려났다.

1988년  「남북한 전쟁 수행능력 비교연구」는 군사력에서 남한이 북한에 대해 우위에 선 지 오래된 것을 실증적 데이터로 밝혀냈다. 1989년 ‘대한민국은 유엔이 승인한 한반도 유일 합법정부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처음 밝혀냈다. 단정수립이후 40년 만에 거짓명제가 드러난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근거가 무너졌다. 1992년 ‘북-미 핵·미사일 위기’가 고조되었다. 선생은 핵 위기의 근본원인이 미국의 ‘핵무기 선제공격권’에 있음을 폭로했다. 1999년 서해교전으로 남북긴장이 고조되었을 때 ‘북방한계선’이 이승만 정권의 북진을 막으려고 유엔군이 쳐놓은 금지선이었음을 밝혀냈다.

1999년 〈연세대학원신문〉은 ‘20세기 인문과학 분야에 영향을 끼친 학자와 저작’에 관한 교수·대학원생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리영희 선생이 첫 번째로 꼽혔다. 선생은 자신의 삶을 이끈 근본이념을 ‘자유와 책임’으로 요약했다. “진정한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자유인’인 까닭에 자기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 결정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이념에 따라, 나는 언제나 내 앞에 던져진 현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棄權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신인’의 배신背信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7쪽)

선생이 광주 망월동 묘역에 잠든 지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남도에 발길이 닿으면 선생의 영전에 적포도주 한 잔 올려야겠다. 선생은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진실은커녕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인간들이 득세하는 목불인견의 세상이었다. 진실을 파헤쳐 드러내려는 의지를 거짓의 가면이 비웃는 시대였다. 젊은 시절 자서전 『역정』(창비, 1988)의 후속작업이 어려울만치 선생의 건강이 나빠졌다. 부제가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인 『대화』는 문학평론가 임헌영이 선생과 대화를 나누고 정리한 구술자서전이었다.

750여 쪽의 두꺼운 양장본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읽어가다, 나는 몇 번이나 울컥했다. 선생은 자녀로 2남1녀를 두었다. 둘째 미정이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했다. 1981년 연세대 생화학과에 들어갔다. 미정이는 영등포와 구로동 일대의 ‘위장취업자’로 공장노동자의 길을 걸었다. 경찰의 딸을 설득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마포경찰서 유치장과 공안검사실에서 만난 딸에게 선생은 말했다.

“네가 무엇을 하든 네 행위에 대해서 반드시 책임을 지는 자세를 견지하라.”

“어떠한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함께 일하는 동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따위의 비열한 행위만은 하지 마라”

1984년 외할아버지 생일날 미정이도 왔다. 정보기관의 눈을 피해 일절 집에 발길을 끊었던 미정이는 어머니가 보고 싶어 외할아버지 댁에 나타난 것이다.  불고기 한 접시를 다 먹고, 밥과 국을 거듭 먹었다. 선생은 자기 몫의 불고기 접시를 딸에게 내밀었다. 사양치않고 또 받아 먹었다. 미정은 곯은 배를 라면으로 때웠을 것이다. 그때 미정이는 하루 11시간 노동하고 일당 2,800원을 받는 구로동 한 봉재공장의 시다였다. 헤어져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딸에게 선생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기에서 끝내 눈물을 떨구었다. 

“날이 차니 조심해 가라”

선생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는 딸에게서 작은 영웅을 보았다. 미정이는 일신의 안락과 영화가 보장된 편안한 생활을 마다했다. 그녀는 10년 가까운 세월을 밑바닥 노동자로 살아가며 온갖 고생을 감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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