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오래 준비해온 대답
지은이 : 김영하
펴낸곳 : 복복서가
『여행의 이유』를 잡고, 작가의 본격적인 여행기를 찾을 때 눈에 뜨인 책이었다. TV를 가까이하지 않는 내가 우연히 모니터에 눈이 갔을 때 나의 시선을 잡아놓을 수 있는 프로그램 중 하나가 EBS의 〈세계테마기행〉이었다. 아직 방영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2007년 세계여행 프로그램 제작진이 작가 김영하를 찾았다. 그들이 어떤 곳을 여행하고 싶으냐고 물었을 때 작가는 ‘마치 오래 준비해온 대답’처럼 시칠리아라고 답했다. 그때 작가는 한국예술종합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고 있었다.
첫 시칠리아 여행을 다녀온 후 작가는 다섯 달 만에 국립대학 교수와 라디오 방송 진행을 그만두었다. 서울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시칠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캐나다 밴쿠버와 미국 뉴욕으로 이어지는 장장 2년 반의 방랑의 시작이었다. 책이 출간된 해에 우리나라에 아이폰이 출시되었다. 스마트폰 이전 시대에 떠났던 아날로그 여정을 담은 여행기였다. 렌터카 조수석에 앉은 아내는 종이지도를 보며 길을 찾았다.
책은 2009년 출간되었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의 개정복간본이었다. 프롤로그 「언젠가 시칠리아에서 길을 읽을 당신에게」, 시칠리아를 주유하는 여정을 그린 15개의 장章, 에필로그 「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로 구성되었다. 시칠리아로 향하는 작가의 발길은 첫걸음부터 꼬였다. 파업으로 끊긴 열차로 작가는 밀라노를 우회하여 리파리 섬으로 향했다. 메시나에서 쾌속선을 타고 한 시간 사십분이 걸려 섬에 도착했다. 리파리는 시칠리아의 북쪽 바다 티레니라해 에올리에 제도의 화산섬으로 인구가 1만800명쯤 되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타오르미나의 그리스식 극장에 앉아 작가는 학창시절 연세대 노천극장의 기시감에 젖어 이렇게 회상했다. “그럴 때 여행을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91쪽) 작가의 발길은 섬 곳곳에 깃든 역사와 신화, 전설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했다.
절벽과 성채가 도시를 보호하는 요새도시 타오르미나는 해발고도 3329미터의 에트나 화산을 등졌다. 아퀘돌치의 황량한 자갈밭 해변을 뒤로하고 내륙 빌라니세타 농장에 여장을 풀고 3일을 묵었다. 천공의 섬을 닮은 고대도시 에리체는 오디세우스가 귀환 여정에서 만난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의 신화의 무대였다.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가 태어나고 죽은 도시로, 한 눈에 그리스 문명과 로마 문명을 일별할 수 있는 도시였다. 작가는 작은 도시 노토에 닷새 동안 머물며 이탈리아 최고의 음식들을 맛보았다. 본래 아크라카스라고 불리던 아그리젠토는 그리스 문명 시절에 건설된 거대한 신전들로 ‘신전의 계곡’으로 불리었다. 콘코르디아 신전은 기적적으로 거의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작가는 에필로그 「내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말 젊은 사람들은 젊은이의 옷을 입는 사람이 아니라 젊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의 취향도 내세우지 않으며 낯선 곳에서 받는 새로운 감흥을 거리낌없이, 아무 거부감 없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2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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