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지은이 : 안희연
펴낸곳 : 창비
제20대 대통령선거일 다음날 아침 모니터를 바라보며 자판에 손가락을 얹었다. 선거일의 독서대에는 20여 년 전 손에 넣은 故 신영복 선생의 『더불어 숲』이 펼쳐져 있었다. 책에 몰두할 수가 없었다. 나는 아직 정치권력의 향방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책장에 펼치지 않은 몇 권의 시집이 모로 누워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빼든 시집이었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은 온라인서점의 시 분야에서 인기도 상위권을 오래 유지했다. 시집을 책씻이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대선 개표 진행은 초박빙이었다. 새벽에 눈이 저절로 떠졌다. 4대강사업으로 나랏돈을 개인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파렴치한 도둑과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 300여명을 바다에 수장시킨 무능 그 자체였던 그들이 5년 만에 다시 정권을 잡았다.
『더불어 숲』에 눈이 갔다면 단 한 줄도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시집을 잡기 잘했다. 시인은 2012년 〈창비신인문학상〉으로 시단에 나왔다. 등단 3년 만에 첫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 2015), 소시집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현대문학, 2019)에 이어 세 번째 시집이었다. 시인은 2018년 온라인서점 YES24에서 실시한 '한국문학의 미래가 될 젊은 작가' 투표에서 시부분 1위를 차지했다. 시집은 3부에 나뉘어 57편이 실렸고, 해설은 문학평론가 양경언의 「고요한 맹렬」이었다.
표제시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에 대해 시인은 "들끓는 마음을 가진, 어느 것도 용서할 수 없는, 한없이 공허한 채로 언덕을 걷고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하며 시를 썼다"고 했다. "마지막 장에 도착했을 땐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 언덕 위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그 사람이 가진 무거웠던 것들이 가벼워져 다시 힘을 내 언덕을 내려가길 바랐다."고 말했다. 나의 단순한 상상력은 표지그림 최산호의 〈너를 만나러〉에서 언덕을 뒤덮은 들꽃과 초록을 보았을 뿐이다. 시집에는 같은 제목의 「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가 네 편이나 있었다. 시들는 할아버지가 오랜 경험에서 우러나온 ‘삶의 비밀’을 시인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시집을 닫는 마지막 시 「열과裂果」(134-135쪽)의 1·2연이다. daum 백과사전에서 '열과'를 찾았다. '익으면 껍질이 저절로 벌어져 씨가 땅에 흩뿌려지는 과실'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또다른 '열과' 현상은 특히 포도가 심했다. 가뭄이 길어져 갈증에 시달렸던 포도가 오랜만에 퍼부은 단비를 되는대로 들이켜 포도송이가 쩍쩍 벌어지는 증상이었다. 대선 결과는 역대 최소 표차로 25만 여 표였다. 서해의 작은 외딴 섬에서 대선일 곤두서는 신경을 어쩔 수 없어 읽던 책을 접고 시집을 펼치는 나는? 마음 한 구석이 쩍쩍 갈라지는 아픔을 스스로 다독일 수 없었던 것일까. 내가 바라보는 세계에 언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올까. 가벼운 마음으로 언덕을 내려오는 날이 돌아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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