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빈 배처럼 텅 비어

대빈창 2022. 3. 18. 07:00

 

책이름 : 빈 배처럼 텅 비어

지은이 : 최승자

펴낸곳 : 문학과지성사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 마른 빵에 핀 곰팡이 /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시인의 첫 시집 『이 時代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의 첫 시 「일찌기 나는」의 1연이다. 1980년대는 혁명과 시의 시대였다. 기존 시문법을 해체한 삼인방으로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를 꼽았다. 최승자의 詩는 ‘부정 혹은 비극의 시학’이었다.

시인은 오랜 침묵을 깨고 11년 만에 여섯 번째 시집 『쓸쓸해서 머나먼』(문학과지성사, 2010)과 일곱 번째 시집 『물 위에 씌어진』(천년의시작, 2011)을 냈다. 일곱 번째 시집은 전부 정신과 병동에서 씌어졌다고 한다.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故 황현산은 말했다. “그는 마치 이 세계가 멸망한 다음날 아침 그 문명의 잔해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오랜 세월 요양원과 정신 병원을 오가며 치료받았던 시인은 상태가 호전되어 경주의 자택에서 혼자 살며 시를 썼다. 여덟 번째 시집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 2016)는 부 구분 없이 92편이 실렸다. |시인의 말|은 ‘한 판 넋두리를 쏟아놓은 기분이다’였다. 시편들은 죽음과 소멸의 예감으로 가득했다. 시어들은 정제되었고, 시편은 압축되었다. 가장 짧은 1행의 「모국어」(99쪽)에서 가 가장 긴 14행의 「세계는」(36쪽)까지. 대부분의 시들이 10행 내외였다. 시인 김소연은 발문 「우리 시대의 유일무이한 리얼리스트」에서 시인의 일대기를 간략하게 정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가 ‘아픈 자’라면 우리는 ‘병들었지만 아프지 않은 자’라고 표현해야 옳지 않을까.” 마지막은 「나의 생존 증명서는」(50쪽)의 전문이다.

 

나의 생존 증명서는 詩였고 / 詩 이전에 절대 고독이었다 / 고독이 없었더라면 나는 살 수 없었을 것이다 // 세계 전체가 한 병동이다 // 꽃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 사람들이 하릴없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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