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년 내 방의 출입문과 책장사이 공간에 달력을 걸었다. 2021년 이철수 판화달력을 걷어내고, 2022년 신영복 붓글씨달력을 드러냈다. 달월을 가리키는 숫자아래 《禁酒》를 붙였다. 주문도에 터를 잡은 후 내 방의 달력은 판화달력과 붓글씨 달력에서 골랐다. 올해는 故 신영복 선생의 붓글씨달력이었다. 1월의 글씨는 큰 글씨로 ‘흙내’, 작은 글씨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모든 쇠붙이는 가라’는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의 한 구절이었다.
술을 끊은 지 햇수로 4년, 개월 수로 32개월을 넘어섰다. 금연은 벌써 만 13년을 앞두고 있었다. 내가 주문도에 첫 발을 디딘 날이 2005. 7. 25. 이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이사 온 날은 2008. 11. 2. 이었다. 텃밭머리에 아버지와 누이를 수목장으로 모셨다. 어머니는 올해 졸수卒壽·구순九旬을 맞으셨다. 나는 호랑이띠 임인년壬寅年 태생으로 올해가 환갑還甲이었다.
주문도는 나의 삶을 일으켜 세운 고마운 섬이었다. 아! 얼마나 자괴심에 부대꼈던가. 대형건설회사의 직업훈련원에서 중장비를 배우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깁스를 하고 병원에 입원한 나에게 구로 노동자 동지들은 다른 삶을 모색하기를 충고했다. 현장노동자를 고집하던 나는 쇠핀이 박힌 다리를 끌고, 농사짓는 시골 고향으로 돌아왔다. 늦은 나이에 경멸했던 공무원 생활로 밥을 샀다. 자기 위선의 역겨움을 술로 달랬다. 사직서를 다섯 번 던졌다. 번번이 나의 사표는 반려되었다. 옛 분들은 인간적으로 따뜻했다. 늙은 부모를 모신다는 자기기만이 그나마 나를 버티게 했다.
상명하복 체제의 관료 조직의 틀에 나를 맞출 자신이 없었다. 엉덩이에 뿔이 난 나는 위계 질서에 매번 반항적이었다. 반골기질은 조직이 요구하는 질서에 어깃장을 놓기 일쑤였다. 가장 먼 낙도로 발령이 났다. 이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다. 이 섬이 나를 구할 수 있을까. 승진욕은 진즉에 내려놓았다. 섬에 들어오고,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눈은 맑게 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되신 어머니를 섬으로 모셨다. 그때 결심했다. 가난하게 살다 이 섬에 뼈를 묻겠다고. 고교를 졸업하고 입에 댄 담배와 술을 끊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술이 문제였다. 세 번 도전 끝에 금단현상을 이겨냈다. 입에 술을 대지 않은 세월이 이제 만 3년이 되어갔다.
나는 남은 生을 20년으로 잡고 있다. 내 의지대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10년일 것이다. 지갑 한 구석에 〈장기기증 희망등록증〉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이 자리 잡았다. 유언장을 작성하고 세월이 많이 흘렀다.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마지막 부탁의 말을 조금씩 고치고 있다. 올해부터 하루 24시간이 온전히 나의 시간이 되었다. 죽음이 일상 속으로 스며 든 신라 왕릉의 경주에서 우선 1년을 살 생각이었다. 코로나 시대는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당분간 논 서너 마지기와 텃밭농사로 삶을 일구어야겠다. 선비들의 유일한 낙은 책읽기였다. 다행히 나는 책을 가까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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