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햇살이 봉구산을 넘어 온 늦은 아침, 산자락 옛길을 따라 아침 산책에 나섰다. 이미지는 고추밭에서 휴식을 취하던 기러기 떼가 인기척에 놀라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옛길은 산자락을 벗어나 논길로 이어지고, 대빈창 해변 제방에 연결되었다. 길을 따라가면 기러기 똥이 여기저기 널렸다. 두 잠을 잔 누에 같기도 하고, 난로 땔감 펠릿처럼 생겼다.
주문도의 겨울 전령은 기러기였다. 녀석들은 콤바인이 들녘에 나타나는 때를 용케 알아챘다. 벼를 벤 논바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는 흘린 낱알을 알뜰하게 주워 먹었다. 몇 년 전부터 겨울 주문도 들녘에 기러기가 많이 날아왔다. 교동대교와 석모대교가 놓였다. 두 섬이 뭍과 연결되며서 녀석들이 부쩍 눈에 띄었다. 아이들이 공룡알이나 마시멜로로 부르는 ‘볏짚 원형 곤포 사일리지’ 때문이었다. 가을 추수가 끝난 들녘 여기저기 둥그렇고 큰 물체가 시린 겨울 햇살을 반사했다. 볏짚에 미생물 첨가제를 처리하여 비닐로 감싼 소사료였다.
연륙교가 개통되고 교통이 편해진 교동도와 석모도 들녘의 볏짚은 소사료로 팔려나갔다. 기러기들에게 먹이 감소로 인한 고난의 겨울이 시작되었다. 강화도에서 여객선이 오가는 섬은 서도西島 군도群島가 유일했다. 주문도 들녘의 볏짚을 소 사료로 팔려면 도선료가 만만치 않았다. 배보다 배꼽이 큰 격이었다.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초가지붕을 씌우거나, 볏짚 생활도구를 만들던 시절은 옛날이었다. 섬 농부들은 볏짚을 고스란히 땅으로 돌려주었다. 이른바 가을갈이였다.
겨울 들녘에서 공룡알·마시멜로를 볼 수 없는 주문도, 볼음도로 기러기들이 몰려들었다. 녀석들의 먹이경쟁이 치열해졌다. 먹을 것은 그대로였고, 기러기 떼는 늘었다. 기러기들은 추위가 닥치기전 콤바인이 흘린 논바닥의 벼알을 주워 먹었다. 알곡이 귀해지자 놈들은 고구마 밭의 잔챙이에 눈길을 돌렸다. 겨울이 깊어가면서 북풍은 칼날처럼 예리해졌다. 먹이는 더욱 궁해졌고, 기러기 들은 고추밭으로 몰려들었다. 농부들은 서리를 맞아 뜨거운 물에 뎁힌 것처럼 늘어진 고춧대를 뽑아 고랑에 늘어 놓았다. 붉은 고추가 쭈그러든 채 마른 고춧대에 매달려있었다.
녀석들이 고추에 입을 대기 시작했다. 혀의 미각味覺 세포는 달고, 시고, 쓰고, 짠 네 가지 맛을 구분했다. 고추의 매운 맛을 내는 성분은 캡사이신(capsaicin)이다. 매운 맛은 통증으로 아픔을 느끼는 통각痛覺세포의 담당이었다. 인간의 뇌는 통증을 맛처럼 기억했다. 기러기도 매운 맛을 통증으로 느끼고 있을까. 청양고추를 삼킨 기러기도 입안이 얼얼해 혀를 굴릴까. 녀석들의 속은 매운 고추에 아리지 않았을까. 어느날부터 봉구산 옛길의 기러기 똥이 붉어졌다. 누에처럼 길쭉한 똥이 아니라, 물기많은 엄지손톱만한 둥그런 형태였다. 주문도 기러기는 청양고추를 먹으며 겨울을 났다. 기러기들은 매운 고추를 먹고 땀을 흘리며 찬겨울을 이겨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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