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녹색평론 창간호
지은이 : 녹색평론 편집부
펴낸곳 : 녹색평론사
책 이미지는 30년 세월의 때가 묻었지만, 내가 책갈피를 연 ‘창간호’는 이제 뽑아낸 새 책이었다. 작년 11월 초에 날아 온 『녹색평론』 소포는 묵직했다. 단행본 『케스―매와 소년』과 30년 전에 출간된 창간호(1991년 11-12월호) 영인본이 들어있었다. 『녹색평론』 181호는 창간 30주년 기념호였다. 독자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한 출판사의 성의였을 것이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니, 나의 삶에서 정기 구독한 잡지는 5개였다. 철없던 시절, 『월간 팝송』이 나의 정기구독 첫머리였다. 대학 시절의 계간지 『창작과 비평』과 공장노동자로 밥을 샀던 그때 월간지 『길을 만드는 사람들』 그리고 2000년 1월호 창간호부터 10여 년을 구독했던 『내셔널지오그래픽 한국판』이 있었다. 나는 『녹색평론』을 100호(2008년 5-6월호)부터 정기 구독했고, 한 발 더 나아가 후원회원이 되었다.
『녹색평론』이 창간되었던 1991년, 이 땅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난무했던 시절이었다. 노태우 정권의 공안 통치에 반대하는 거리 시위에서 대학생 새내기 명지대 강경대가 백골단의 폭력진압으로 사망했다. 박승희·김기설·박창수······. 김귀정까지. 11명의 대학생과 노동자, 민주화운동가가 분신·투신 자살했고 의문사 당했다. 이른바 분신정국이었다. 그때 나는 안산공단의 노동자였다.
故 김종철 선생의 창간사 「생명의 문화를 위하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는가? 지금부터 이십년이나 삼십년 후에 이 세상에 살아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 것인가?” 선생은 말했다. 우리가 죽자살자 따라갔던 근대화, 즉 서구 산업문명은 폭력적·파괴적 문명으로 지금의 생태학적 재난의 주범이라고. 우리가 인간적인 삶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건강한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150쪽의 〈창간호〉는 3,000부를 찍었다고 한다. 가격은 2,500원이었다. 표지 디자인은 ‘1세대 북 디자이너’ 정병규였고, 편집·제작은 장길섭이었다. 임홍빈의 「기술과 책임」, 이병철의 「밥의 위기와 생명의 농업」, 천규석의 「한살림 공동체운동의 실천과 사상」, 김종철의 「시의 마음과 생명공동체」 그리고 두아미쉬-수쿠아미쉬족族의 추장 시애틀의 그 유명한 연설 「우리는 결국 모두 형제들이다」. 이선관, 이가림, 윤중호의 시. 인도의 생태운동가 반디나 쉬바의 「과학, 자연, 性」, 라오스의 민중생활을 그린 「자연경제와 마을민주주의」, 미국의 시인·생태운동가 웬델 베리의 「나는 왜 컴퓨터를 안 살 것인가」와 「여성주의, 육체, 기계」. 『자연의 종말』에 대한 자연과학자 이추경, 『中國大同思想硏究』에 대한 철학자 이규성의 서평이 실렸다.
시인 장정일은 말했다. "생태주의는 마술도 종교도 아닌 근대과학이 배제해 온 엄연한 과학이며, 근대과학에 대항하는 또 다른 과학이다. 그런 뜻에서 『녹색평론』은 권력과 자본의 이해에 충실한 근대과학의 교의를 거스르는 가장 급진적이고 반역적인 잡지" 라고. 세계는 코로나 펜데믹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근대문명의 생태계 훼손, 기후위기 등은 녹색평론이 창간부터 초지일관 경고한 문제들이었다. 30년을 숨 가쁘게 달려온 『녹색평론』이 1년간 휴간에 들어갔다. 나는 절실하게 녹색평론의 복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