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삶을 바꾼 만남
지은이 : 정민
펴낸곳 : 문학동네
오랜 기간 다산의 발자취를 더듬어 온 고전인문학자 정민(鄭珉, 1961년 - )은 그동안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다산어록청상』,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다산의 재발견』을 내놓았다. 그는 다산 정약용의 삶과 학문적 업적, 문화사적 의미를 다각도로 밝혀냈다. 『삶을 바꾼 만남』은 스승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년)과 제자 치원 황상(巵園 黃裳, 1788-1870년)의 도탑고 신실한 사제지간의 정情을 그렸다.
1801년 다산은 신유박해로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당했다. 주막집 봉놋방 좁은 서당의 이름은 〈사의재四宜齋〉였다. 네가지 ‘마땅함(宜)’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담백한 생각, 장중한 외모, 과묵한 말, 무거운 몸가짐을 뜻했다. 1802년(임술년) 10. 10. 열다섯 살의 더벅머리 소년 황상이 찾아왔다. 소년은 지방 관아의 하급관리 아전의 아들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둔하고 앞뒤가 꽉 막혔으며 답답하기 이를 데 없다고 말했다. 스승은 답했다. 배우는 사람들에게 세 가지 문제가 있다. 민첩한 이는 한번만 읽고 바로 외우지만, 제 머리만 믿고 대충 넘어간다. 예리하게 글을 잘 짓는 이는 핵심을 금새 파악하지만 재주를 못 이겨 튀어나간다. 깨달음이 재빠른 이는 대번에 깨닫지만 투철하지 못해 오래가지 못한다. 스승의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 「삼근계三勤戒」의 가르침을 제자는 명심누골(銘心謱骨), 마음과 뼈에 아로새겨 60년을 한결같았다.
소년은 불과 3년 반 만에 손암 정약전이 “월출산 아래 이런 문장이 나타나다니”하고 놀랄 만큼 훌쩍 성장했다. 1801년 11월 강진으로 유배당한 다산이 마재 여유당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9월이었다. 마흔에 내려가 쉰일곱의 늙은이가 되어 돌아왔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세월이었다. 다산이 서울로 돌아오자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기웃거렸다. 다산의 힘을 빌린 출세욕 때문이었다. 그들은 다산이 힘이 되어주지 못하자 스승의 흠을 잡고 뒤돌아섰다. 이때 홀로 묵묵히 스승의 뜻을 지킨 한 사람의 제자가 황상이었다. 그는 가솔을 이끌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책 속에 묻혔다.
다산은 회혼연(回婚宴)으로 잡았던 1836. 2. 22. 아침 8시에 세상을 떠났다. 스승을 뵙고, 19일 마재를 떠나 고향으로 향했던 황상은 발길을 돌려 문상을 했다. 황상이 마재를 다시 찾은 것은 1845. 3. 15. 거의 10년만이었다. 다산의 첫째아들 정학연은 예순셋이었고, 황상은 쉰여덟이었다. 스승의 아들과 제자는 집안의 이름으로 계를 맺는 「정황계안丁黃契案」을 만들었다. 자손끼리도 아름다운 만남을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1885. 8. 다산의 둘째아들 운포 정학유의 죽음을 조문하러 황상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상경했다. 노년의 몸으로 다섯 번째 마재 여유당을 향한 천릿길 걸음이었다.
1859년 정학연이 세상을 떠나자 황상은 집 뒤편 골짜기 한 칸짜리 일속산방(一粟山房, 좁쌀 한 톨만한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1870년 83세로 세상을 떠날때까지 시를 읊고 글을 짓는 은자隱者의 삶을 살았다. 『삶을 바꾼 만남』은 시골 아전의 아들로 더벅머리 소년 황상이 스승 다산을 만나 당대 최고 시인중의 한 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렸다. 황상은 스승 다산을 만난 지 60년이 흐른 임술년(壬戌年)이 되었을 때 이렇게 적었다. “크게 이룬 것은 없지만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지켰노라.” 마지막은 1856년 3월 강진으로 내려가는 황상에게 써 준 추사 김정희의 시 「증황치원 贈黃巵園」(511-512쪽)의 전문이다.
眇然一粟敞山茨 조그만 좁쌀만 한 산속 집을 지으니
萬古松靑靑上眉 만고송 푸르구나 눈썹까지 올라오네.
直溯江西宗派譜 강서시파 중심 계보 거슬러 곧장 가며
旁參元祐罪人詩 원우(元祐) 죄인 소동파를 곁으로 살폈구려.
心空綺語無三毒 고운 말은 마음 비워 삼독(三毒)이 아예 없고
手卓紅旂起百痿 붉은 깃발 높이 들어 시든 기운 일으켰지.
甘紅露味眞佳否 다디단 홍로(紅露)의 맛 참으로 맛있던가
藜莧圖書道自肥 거친 음식 책에 묻혀 도가 절로 살졌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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