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선비가 사랑한 나무
지은이 : 강판권
펴낸곳 : 한겨레출판
『선비가 사랑한 나무』는 수학樹學이라는 학문체계를 만들어가는 나무인문학자 강판권(1961년 - )의 나무를 통해 수양한 성리학자들의 이야기였다. 글은 성리학의 각 개념마다 16종의 나무를 정하고 조선의 대표적인 선비들의 세계관을 엿보았다. 나무와 성리학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한국인에 가장 익숙한 개념 충忠과 효孝를 앞세웠다.
대학의 팔조목八條目 -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와 성리학의 핵심 사상 심心과 경敬을 살폈다. 그리고 유교에서 중시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인 오상五常 -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이렇게 16개 챕터로 구성되었다. 성리학에서 근사近思는 ‘가까이에서 생각한다’는 뜻으로 성리학자들의 가장 기본적인 공부 방법이었다. 저자는 ‘나무를 통한 근사’라는 방법론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
배롱나무와 忠은 단종복위 운동으로 38세에 죽은 성삼문(1418-1456)이다. 백일동안 핀다는 붉은 꽃은 성삼문의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었다. 후손들은 성삼문의 묘 앞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대추나무와 孝는 개혁군주 정조(1752-1800)이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대한 효는 후세의 귀감이 되었다. 정조가 하루 정사를 마치고 독서하는 존현각尊賢閣 뜰에 한 그루 대추나무가 있었다.
매실나무와 格物은 퇴계 이황(1501-1570)이다. 퇴계가 평생 쓴 매화시는 72題 107首였다. 유언은 “매화분에 물을 주어라.”였다. 이는 격물을 통해 성찰하면서 살라는 당부였다. 측백나무와 致知는 추사 김정희(1786-1856)이다. 추사가 이상적에 그려 준 그림 〈세한도〉에는 『논어』의 「자한편」의 한 구절이 적혀있다. “歲寒然後知松栢之後彫-날씨가 추운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뒤에 시든다는 것을 안다” 회양목과 誠意는 용재 이명구(1842-1925)이다. 용재는 고향 경남 밀양 퇴로退老로 돌아와 삼은정三隱亭을 짓고 뒷담에 회양목을 심었다. 자귀나무와 正心은 이옥(1760-1815)이다. 이옥은 『양화소록養花小錄』의 저자 강희안姜希顔(1417-1464) 이후 조선 최고의 식물전문가였다. 『이옥전집』의 「백운필白雲筆」의 ‘담목談木’에 소개되는 두 번째 나무 합환목合歡木이 자귀나무였다.
차나무와 修身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다산은 1801년 신유사화로 18년의 유배생활에서 혜장惠藏(1772-1811) 스님을 제자로 거두어 조선 후기의 차 문화를 부흥시켰다. 회화나무와 齊家는 송희규(1494-1558)이다. 5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 경북 성주에 돌아와 백세각白世閣을 지었다. 학자수學者樹라고 불리는 회화나무 세 그루를 백세각 대문 안 담장 주변에 심었다. 뽕나무와 治國平天下는 역대 조선의 왕들이었다. 봉건 왕조에서 농사를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듯이 양잠도 필수 요소였다. 선잠단先蠶壇의 제사는 국가행사였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뽕나무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경계를 이루는 담에 살고 있었다. 천연기념물 제471호로 수고가 12미터나 되는 조선 치국治國의 상징이었다.
주목과 心은 우암 송시열(1607-1689)이다. 나무 중에서 변치 않는 마음처럼 속이 붉은 나무는 朱木이다. 창덕궁 주합루宙合樓 앞에 큰 주목이 살고 있다. 은행나무와 敬은 주세붕(1495-1554)이다. 주세붕은 순흥에 우리나라 최초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면서 죽계천의 바위에 ‘敬’자를 새겼다. 퇴계가 풍기군수로 부임해 사액을 받아 소수서원이 되었다. 소수서원에는 500살 정도 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살고 있다.
살구나무와 仁은 공자(기원전551-479)이다. 공자는 살구나무 언덕 행단杏壇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인간 존재의 근원으로 仁이었다. 대나무와 義는 매천 황현(1855-1919)이다. 1910. 9. 10. 56세의 황현은 나라가 망하자 「절명시絶命詩」 네 편을 남기고 자결했다. 밤나무와 禮는 栗谷율곡 이이(1536-1584)이다. 율곡을 모신 파주 자운서원 입구에서 율곡의 묘로 가는 길목에 율곡의 신도비와 밤나무가 서있다. 잣나무와 智는 강직한 선비 홍여하(1621-1678)이다. 그의 후손 홍우태는 1836년 경북 군위 한밤마을 남천고택南川古宅(上梅宅)을 지었다. 사당 앞 사랑채를 쌍백당雙柏堂이라 짓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 향나무와 信은 동방오현 東方五賢의 한 사람 회재 이언적(1491-1553)이다. 회재가 태어난 양동마을과 수양한 독락당獨樂堂, 회재를 모신 옥산서원玉山書院에 향나무가 많이 자라고있다. 선비들이 조상을 모신 사당과 자신의 거처에 향나무를 심은 것은 향을 품고 있는 향나무로 정화하려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무인문학자는 말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살아가는 나무는 그 자체로 천지의 원리를 터득한 존재로 나무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실천하는 존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