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지은이 : 박노자
펴낸곳 : 한겨레출판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을 스톡홀름증후군이라고 한다. 마지막 책장을 덮자 느닷없이 떠오른 개념이다. 왜일까. 저자는 현재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세상에서 가장 사회복지가 잘 구현된 국가의 하나인 노르웨이의의 수도 오슬로 대학의 한국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웃국가 스웨덴의 수도가 스톡홀름이다. 어릴적 멋모르고 암기한 스칸디나비아 3국과 수도 이름에서 연상되었을까. 아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도저히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매일같이 터지는 이 땅의 화딱지나는 현실의 모순을 쪽집게처럼 귀화인 박노자가 헤집었다.
한국은 문화적 배타성, 강요된 민족주의, 권위주의, 인종주의적 이중 잣대, 국가주의적 군사문화 등 부조리한 전근대성이 사회 곳곳에 지뢰처럼 매장되어 있었다. 이 땅은 인본주의(!)를 눈씻고 찾아도 볼 수 없다. 자본주의가 제1의 종교가 된 돈벌레, 경제동물들이 판치는 무한경쟁의 아수라지옥으로 전락했다. 이영희 선생님의 에세이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가 생각나고, 레닌의 어록 중 '오른쪽에 치우친 추를 가운데에 놓기 위해서는 왼쪽으로 극단적으로 당겨라'가 떠오른다. '한 국민은 그 국민의 자질에 맞는 사회 체제와 정부를 갖게 돼 있다'는 격언이 있지만, 한국의 정치 지형은 극단적인 우편향이다. 이에 박노자는 '양육·의료·교육을 공동체가 책임지는 나라' 즉 공공성의 국가, 복지국가로의 대전환을 이루기 위해 좌파의 국가권력의 평화적 탈환을 꿈꾼다.
이 땅의 현실은 진보정당이 자리잡기에 토양이 너무 척박하다. 현재 북유럽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민중의 투쟁으로 쟁취하였지만, 압축성장한 한국의 서민은 권리를 쟁취한 경험이 없어 '시민(?)'이 낯설기만 하다. 박노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5%도 안되는 재벌기업과 부동산 부자의 특권층 사익을 보장해주는 폭력기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것이 바로 21세기 세계경제대국 13위라는 대한민국의 알맹이없는 자화상이다. 20대의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70% 이상이 '88만원 세대'의 비정규직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 땅은 이미 저성장 시대로 접어 들었다.
MB정권은 토건과 수출만이 살길이라고 마구잡이 삽질을 단행하여 서민들을 벼랑으로 몰고간다. 저자는 '한국적 정치 상황에서 온건한 자유주의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주의적·사민주의적 노선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기에 '당신들의 대한민국 세번째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복지국가라는 선명한 방향성, 자유주의자가 아닌 좌파라는 추진주체, 진짜 시민사회의 형성이라는 방법론까지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서 나는 저자를 소개하면서 엉뚱하게, 도가의 시조 '무위자연'의 노자를 떠올렸다. 이번글을 잡으면서 자료를 뒤적이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을 잘아는' 귀화인 박노자의 이름에 대한 연원을 정확히 알게됐다. 성씨 '朴'은 스승인 고려인 3세 미하일 박, 한국명 박준호에서 따왔고, 이름 노자(露子)는 '러시아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박노자의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이다.
여담 한 가지. 언젠가 어머니는 밥상머리에서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건넸다. '어쩜, 우리가 표를 던진 사람들은 왜 한명도 당선이 안 되니.' 어머니는 자식들 중 유일하게 대학물을 먹은 막내 아들의 정치성향을 쫓아, 선거철마다 표를 던졌다. 그 결과는. 87년 백기완 민중후보의 무소속 출마이후 현재까지 단 한명도 당선자를 보질 못한 것이다. 글을 모르는 어머니에게 그래도 대선이나 총선은 한 표를 행사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지만 지방선거는? 올해처럼 8장을 투표하는 큰일은 어머니에게 큰 곤욕이 아닐 수 없다. 막내아들의 설명을 듣고 어렵게 표에 도장을 찍었지만,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혹시 어머니도 사표심리에 휘말려 몰래 한두장 쯤은 첫번 칸에 도장밥을 눌러 댔을지도 모르겠다. 에이! 그럴리가. 글을 모르시는 부모님이 자식의 정치 성향을 따라 '진보정당'에 표를 던지는 집안은 도대체 이 땅에서 얼마나 될까.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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