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

대빈창 2023. 1. 3. 07:30

 

책이름 :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

지은이 : 아사카와 다쿠미

옮긴이 : 심우성

펴낸곳 : 학고재

 

〈학고재 신서 7〉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조선을 생각한다』를 읽고, 〈학고재 신서 8〉 『조선의 소반・조선도자명고』를 연이어 잡았다. 신서 7・8의 옮긴이는 민속학자 심우성沈雨晟 이었다. 『조선을 생각한다』에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의 소반』에 붙인 발문과 『조선도자명고』의 서문과 발문이 실려 있었다. 앞날개 저자의 이력이 실릴 곳에 ‘망우리에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비’ 사진이 붙었다. 비문은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였다.

아사카와 다쿠미(淺川 巧, 1891-1931)는 형 아사카와 노리타카(1884-1964)의 영향으로 ‘조선의 미’ 연구에 뛰어들었다. 노리타카는 1913년 경성남산심상소학교 미술교사로 부임했다. 그는 조선 도자기에 심취해 1946년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700여 곳을 답사했다. 소장했던 공예품과 도자기 3,500점은 국립민족박물관에 기증했다. 형이 선물로 보내 준 〈청화백자 주초무늬 모따기 항아리〉를 보고 다쿠미는 조선 도자기에 매료되었다. 형의 권유로 조선에 건너 온 다쿠미는 조선총독부 산림청 임업시험소 직원으로 취직했다.

다쿠미는 진정한 조선인의 친구였다. 그는 조선에 17년을 살면서 조선 문화와 산하에 심취했다. 청량리의 집은 온돌방이었고, 한복 바지저고리를 즐겨 입었다. 조선식 장롱에 조선 음식을 먹었다. 치열하게 공부하여 자유자재로 조선어를 구사했다. 적은 봉급을 쪼개 조선인 동료 자식과 이웃집 조선인 학생 여러 명에게 드러내지 않고 학비를 대었다. 그가 급성 폐렴으로 이른 나이인 마흔 살에 세상을 떠나자 엄청난 봄비 속에서도 이웃 조선인들은 서로 상여 메기를 자청했다.

다쿠미는 죽기 직전 “나는 죽어도 조선에 있을 것이오. 조선식으로 장례를 지내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는 이문동 고개 공동묘지에 묻혔다. 다쿠미는 산림청 임업기사로 홍릉 및 광릉수목원 기틀을 다졌다. 조선의 공예와 도자기를 연구・수집했다.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조선민족미술관〉을 건립했다. 아사카와 형제는 ‘조선의 것은 조선에 두어야한다’는 지론으로 애써 모은 수장품을 모두 이땅에 남긴 조선을 진정으로 사랑한 일본인이었다. 다쿠미는 두 권의 저서 『조선의 소반』(1929), 『조선도자명고』(1931, 사후)를 남겼다.

다쿠미의 공예관은 『조선의 소반』에서 ‘올바른 공예품은 친절한 사용자의 손에서 차츰 그 특질이 지닌 아름다움을 발휘하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사용자가 완성자라고 할 수 있다. (······) 조선의 소반은 순박한 아름다움에 단정한 모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봉사하며 세월이 흐를수록 아취를 더해가니 올바른 표본이라 할 수 있다.’(18-19쪽) 『조선도자명고』에서 ‘도자기는 애용되기 위한 기물器物이라고도 한다. (······) 다행히 조선시대의 도자기는 오랜 세월 애용됨으로써 아름다운 빛을 내는 세전품世傳品이 될 수 있었다.’(92쪽)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의 묘지가 파괴・훼손되었다. 유덕을 기리는 이들은 아사카와 다쿠미의 묘소를 1964. 6. 20. 〈망우리 공동묘지〉에 복원했다. 오랜 세월 묘소를 지켜온 사람들은 임업시험장 직원들이었다. 망우리의 넓은 묘역에 묻힌 단 한 사람의 일본인이었다. 다쿠미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4월 2일이 되면 수많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망우리 공원묘역의 아사카와 다쿠미 묘소에서 추모제를 지내오고 있다. 그는 한복을 입고 조선 땅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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