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특강 / 지금 이 순간의 역사
지은이 : 한홍구
펴낸곳 : 한겨레출판
섬은 고립되었다. 본도를 떠난 저녁배가 30분만에 석모도 어류정항 앞에서 회항했다. 정확했다. 연평도가 북한의 포격 도발에 쑥대밭이 된 바로 직후였다.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었다. 오늘 정시 퇴근은 글렀다. 여지없이 비상근무가 떨어졌다. 어스름이 밀려온다. 이때 쯤이면 저멀리 바다부터 뽕짝이 들려와야 했다. 여객선이 섬 사이를 누비면서 승객을 내려 놓는다는 신호였다. 오늘따라 조용하다. 섬 사람들은 뱃고동보다 오히려 바다바람을 타고 트로트가 들려오면 배가 어느 쯤에 닿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물때에 따라 다소간 배가 선창에 닿는 시간이 들쑥날쑥하기 마련이다. 당직자에게 잠시 짬을 내어 면사무소 현관문을 나섰다. 물량장 초입의 숙부집을 쓸쓸히 니켈 가로등이 비추고 있었다. 해만 떨어지면 인적드문 섬마을이지만, 그나마 쏘다니던 들고양이마저 보이지 않았다. 얼른 숙부와 저녁 밥상을 마주하고 철야근무에 들어가야 했다. 숙부는 TV앞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브라운관은 쏘아보고 있었다. 북한의 포격에 날벼락을 맞은 연평도는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지친 몸을 간신히 뒤척이고 있었다. 섬 여기저기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 올랐다. 섬주민들은 피난길에 올랐고, 포격을 맞은 산은 온통 화염에 휩싸였다. 산불은 제멋대로 산들을 할퀴고 있었다. 전자밥통의 한주먹 밥은 며칠이나 지났는 지 누렇게 변색이 되었고 그나마 덩어리져 굳어 있었다. 부엌의 가스렌지에 라면 물을 올렸다. 조도 낮은 백열등이 바람벽 틈새의 한기에 건들거렸다. 거미줄로 커튼을 드리운 아귀가 맞지않는 키 높이의 부엌 창문으로 설핏 희끄무레한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배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낯선 저 물체는 무엇일까' 괜한 두려움이 밀려 들었다. 녹슨 양철문을 제끼고 물량장 쪽으로 길게 고개를 빼 들었다. 얼마전 뭍에서 건너 온 경찰서장과 군복 차림의 예비역들이 온 마을사람들을 모아놓고 테이프를 끊었던 큰 비석이었다. 사람 키보다 갸웃 반은 넘는 비석이 물량장 가로등 불빛에 얼비쳤던 것이다. 개다리 소반에 군내나는 묵은지 한 사발과 라면냄비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서다 하마터면 나는 상을 엎을 뻔 했다. TV를 노려보는 숙부의 눈은 화면을 뚫을 것 같이 형형했다. 언제적 군복인 지 숙부는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아니! 북망산이 내일모레 인 양반이 뜬금없이 군복의 날을 세우다니. 가끔 정신이 나가기는 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었다. '작은 아버지, 저녁 드세요.' 상의 왼 호주머니 계급장을 다리미에 힘을 주어 누르던 숙부의 눈과 얼핏 마주쳤다. 막걸리를 거나하게 마신 것처럼 가는 실핏줄이 흰자위를 덮어 섬찟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핸드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난리가 났던데, 니 있는데는 어떠냐.' 이 섬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이었다. 위로 형 둘을 낳고, 문전옥답을 팔아 뭍으로 나가 막내인 나를 본 것이다. 섬에는 아버지의 유일한 핏줄인 숙부만 계셨다. 숙모님은 어릴적에 세상을 뜨셨고 사촌들은 대처에 자리를 잡았다. 가끔 정신이 나가시는 숙부가 고향을 혼자 지키시는 것이다. 며칠 뒤 인사발령으로 나는 이 섬을 벗어날 것이다. 그런데 일이 터진 것이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당직자는 담요을 뒤집어 쓴 채 난로가에서 고개방아를 연신 찧고 있었다. 언제나 카페리호가 정박해 있던 바다가 텅 비었다. 그렇다. 지금은 비상사태다. 숙부집에 내려가 아침밥을 앉혀야겠다. 멀리 선창가 가로등 불빛에 인기척이 어른거렸다. 숙부집 대문으로 들어서려다 나는 발길을 돌려 물량장으로 향했다. 작은 아버지셨다. 군복 차림의 숙부가 '향토수호전적비'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6.25때 인민군이 새벽에 상륙을 시도했을 때, 청년방위군이 용감하게 적도들을 무찌른 전과를 후세에 알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었다. 그런데 뒷구멍으로 말이 많았다. 이 섬 출신의 유지가 가문을 빛내기 위해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었다고. 그리고 전적비 건립기금을 혼자 감당했다고. 그날 주민들은 간만에 돼지비게로 목구멍에 낀 때를 벗겨냈다. 그리고 한잔 술로 가을 일에 지친 몸뚱이를 추스렸다. 태풍전야의 섬은 괴괴한 어둠을 한꺼풀 벗겨내고 있었다. 지금 것보다 두세배는 큰 거대한 비석이 후일 이 외딴 섬의 선창에 세워질 것이다.
전태일 열사 40주년 기념일부터 나는 역사학자 한홍구의 특강에 보름간 매달렸다. 2009년 우리는 전직 두명의 대통령을 한꺼번에 잃었다. 노무현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서거라는 한 시대의 좌절은 다름아닌 민주개혁세력의 불완전한 민주화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저자에 의하면 식민지에서 해방된 제3세계 국가 중에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세력이 살아남은 국가는 딱 두 나라다. 우리나라와 남베트남. 이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흡수통일되었고, 한국만 남았다. 이 땅은 친일파를 숙청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친일파에게 민족해방세력이 숙청당했다. 민주화가 역주행 당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이런 불행한 현대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기에 과거 청산을 못한 나라의 민주화은 더욱 더디고 힘들고 갈길이 멀 수밖에 없다. 87년 6월 항쟁으로 이 땅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하지만 불완전한 경제적 민주주의로 인해 민주화의 결실은 고스란히 재벌에게 넘어갔다. 80년대 신군부의 우두머리 전두환의 괘씸죄에 걸려 양정모의 국제그룹이 공중분해되지 않았는가. 한마디로 '죽 쑤어 개 준 격'이 되었다. 지금 삼성을 그렇게 날릴 수 있을까. 오히려 삼성의 눈에 난 정당은 정치자금이 딸려 정권을 잡기가 힘들어졌다. 거칠게 말하면 이 땅의 민주화라는 것이 고작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 왕국으로의 전락이었다. 그 결과가 신보수주의가 강화되는 흐름 속에서 막장까지 간 토건국가로서의 모습이다. 즉 제 살을 뜯어 재벌의 아가리에 처넣는 모습이 바로 한국의 오늘이다. '4대강 사업'으로 대표되듯이 이 땅은 전형적인 토건 국가로 '돼지밥통정치(porkharrel politics)'라고 한다. 즉 먹이사슬을 공유하고 그 돼지밥통에 주둥이를 처박은 토건족들의 담합정치를 비꼰 것이다. 두 권의 책씻이를 끝내고 나는 역동적인 현대사를 써 내려가는 조국에서 역사의 큰 고비마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나를 회고하고 있었다. 5· 18 광주민중항쟁, 87년 6월 항쟁, 91년 투쟁 그리고 2008년의 촛불집회. 그런데 돌연 북한의 연평도 포격이 터졌다. MB정권은 국민과 참여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떠 벌인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10년동안 이 땅의 민중들은 그나마 '전쟁의 공포'를 잊고 살았다. 그런데 3년이 채 안된, 이 정권에서 전쟁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공포가 일상화되었다. 이 땅의 보수는 무능하다. 고작 떠벌이는 소리가 천암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의 원인이 '햇볕정책'이라고 낯간지러운 소리다. 말도 안돼는 부관참시인 것이다. 지금도 나의 뇌리 한 구석에서 메아리가 파문을 그리고 있다. '나는 총을 잡았을까?' 1980년 5월 26일 전남 도청에는 광주 시민 3만명이 모여 있었다. 계엄군은 가두 방송을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폭도들을 소탕한다.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대부분의 시민들은 집으로 돌아갔으나, 역사를 지키려는 소수가 총을 들었다. 5월 27일 새벽, 20분만에 도청은 함락되었다. 마지막은 책의 서문에 실려있는 이광웅 선생(신군부가 고문으로 조작한 용공사건인 교사간첩단 '오송회'사건의 피해자)의 '목숨을 걸고'라는 시를 전재한다.
이 땅에서 / 진짜 술꾼이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술을 마셔야 한다
이 땅에서 / 참된 연애를 하려거든 / 목숨을 걸고 연애를 해야 한다
이 땅에서 / 좋은 선생이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교단에 서야 한다
뭐든지 / 진짜가 되려거든 / 목숨을 걸고 / 목숨을 걸고 ``````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명훈 소설 두 권 (0) | 2010.12.13 |
---|---|
숲 생태학 강의 (0) | 2010.12.07 |
물은 누구의 것인가 (0) | 2010.11.23 |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0) | 2010.11.02 |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 (0) | 2010.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