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대빈창 2023. 1. 16. 07:30

 

책이름 :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1

지은이 : 박경철

펴낸곳 : 리더스북

 

출판칼럼니스트 故 최성일의 유고집 『한 권의 책』을 잡고, 군립도서관 홈페이지에 검색한 몇 권의 책 중 하나였다. 개정판은 면 단위의 〈공공도서관〉에 있었다. 선창에서 읍내로 향하는 길에서 외떨어진 도서관에 일부러 들렀다. 두 권의 책에서 1권을 잡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지금 그 노고가 아깝지 않았다. 내가 잡은 책은 초판 114쇄에 이은 개정판 4쇄로 2011년 10월 출간되었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저쪽의 세월이었다. 도대체 책은 지금 몇 쇄를 찍어냈을까. 책의 카피는 ‘100만 독자를 울리고 웃긴 가슴 찡한 삶의 풍경화’였다.

늦었지만 다행이었다. 그동안 나의 독서이력은 베스트셀러와 일부러 비껴나 있었다. 대중매체와 거리가 먼 나의 일상도 무관심에 한몫 더했을 것이다. 저자의 이력을 보니 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였다. 80년대 중반부터 취미로 경제공부를 하고,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을 펴낸 그는 ‘국내 최고의 기술분석가’, ‘증권사 직원들에게 주식을 가르치는 외과의사’로 유명했다. 그의 강연과 칼럼은 대중의 큰 호응으로 〈청춘콘서트〉로 이어져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다. TV와 담을 쌓고, 주식투자를 도박으로 여기는 경직된 좌파(?)에게 저자가 눈에 뜨일 수 없었다.

나는 책장을 넘기며 눈시울이 뜨거워졌고, 코끝이 찡했고, 가슴이 울컥했다. 경북 안동의 외과의사가 깊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 본 이웃과 풍경에 관한 글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첫 꼭지, 종합병원 인턴시절 교통사고 환자의 응급치료 과정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아픈 갈등을 그린 「의사 짓을 제대로 한다는 일」에서 마지막 꼭지, 주지 문인스님과 사람 사는 게 다 법문이라는 진홍스님과 절집의 일꾼 희원 스님의 이야기 「봉정사 세 스님들」까지 35편의 이야기를 담았다. 나의 가슴을 두드린 인상적인 이야기 세편이다.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는 교통사고로 종합병원에서 1차 응급조치 후 후송된 중환자실의 할아버지 보호자는 만난 지 두 달 밖에 안 된 할머니 한 분이었다. 할머니가 열여덟에 시집을 갔고, 할아버지는 결혼 두 달만에 일본군에 강제징집되었다. 할아버지는 사할린에서 중노동에 시달렸고, 할머니는 50년 청상과부로 사셨다. 일본 NHK 방송 특집과 한국의 〈인간시대〉 방송을 타고 할아버지는 50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오셨다. 할머니와 해후한 지 두 달 만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원인불명의 패혈증으로 할아버지의 길고 고달픈 삶 끝에 찾아 온 행복은 슬프게 끝났다.

「비정한 모성」은 10년 만에 가장 춥다는 날 응급실에 환자가 실려 왔다. 물들인 낡은 군복 상의에 기름에 찌든 바지를 입은 환자는 오른팔이 없었다. 가장 치명적인 독극물 제초제 그라목손을 마신 환자였다. 사망까지 지독한 고통을 안기는 그라목손을 마신 사람의 회생은 불가능했다. 위세척을 한 환자는 3일이 지나면 고통 속에 죽을 것이다. 자살환자는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았다. 돈에 찌든 홀어머니는 아들과 추운 겨울의 칼바람 속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나섰다. 예정된 죽음을 앞두고 택시는커녕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그들을 보며 임상실습 시절 시골의사는 뛰어나가 택시비를 할머니 손에 쥐어주었다. 40대 장애아들과 70대 노모는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저 멀리 집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나는 지금 부끄럽다」는 다섯 살 미진이가 계단에 넘어져 응급실로 실려 왔다. 실혈성 쇼크로 뱃속에서 대량 출혈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이는 의식이 가물거리면서 쇼크 상태로 빠져들었다. 다행히 비장 파열이었다. 전체 피의 총량보다 더 많은 피를 수혈 받는 수술 끝에 미진이는 어렵게 생환했다. 일반병실로 옮긴 미진이가 사흘 째 되는 날 패혈증이 의심되는 증세가 나타났다. 반코마이신을 긴급 투약해야하는 상황이었으나 의료보험 규정에는 패혈증이 확인되어야 사용할 수 있다. 시간은 흘러갔고, 시골의사는 고민 끝에 규정을 어기고 투약했다. 다음날 미진이는 패혈증 증세가 나타났고, 그때서야 혈액배양 검사 결과가 나왔다. 시간과의 싸움에서 진 어린 미진이의 의식이 사라졌다. 실제 우리나라 의료보험제도는 사람을 죽이는 제도였다. 시골의사는 의료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종합병원 전문의로 근무한 지 1년 만에 스스로 옷을 벗고, 고향에 내려와 개업했다.

“세상에는 정말 삶에 찌들어 죽음을 선택하면서도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도 화살을 겨누지 않는 분들이 있다. 내게 주어진 작은 시련도 모두 세상 탓으로 돌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세상이 나를 죽였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누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166-167쪽) 이었다. 시골의사는 갈 데까지 간 천민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순박한 사람들의 수동성이 갖는 애처로움에 눈물을 뿌렸다. 1권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연이어 2권을 열면서 나의 가슴에 무거운 납 한 덩어리가 가라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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