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대빈창 2023. 1. 20. 07:30

 

책이름 :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지은이 : 유하

펴낸곳 : 문학동네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 〈말죽거리 잔혹사〉(2004), 〈비열한 거리〉(2006), 〈쌍화점〉(2008), 〈하울링〉(2012) 등. 영상세대는 유하를 영화감독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에게 유하는 시인이었다. 그는 1988년 「무림일기」 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했고, 대여섯 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나의 책장 한 구석에 『무림일기』(문학과지성사, 2012, 재출간본),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문학과지성사, 1991) 두 권의 시집이 자리 잡았다. 군립도서관을 드나들면서 오래전에 읽었던 시인을 떠올렸고, 우선 산문집을 대여했다.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문학동네, 2012)는 시인의 첫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1995)의 개정증보판이었다. 1부 ‘추억의 힘’은 동시상영관과 세운상가를 누비던 유년・학창 시절의 추억과 고향과 가족 그리고 첫사랑을 떠올렸다. ‘다리 네 개 달린 동남 샤프 텔레비전이 우리 집 안방에 놓이던 날의 환희. 다시는 티브이 땜에 수모를 당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그날은 온종일 가슴이 뿌듯했다.’(21쪽) 초가에 살던 가난한 우리집은 살림에 걸맞지 않게 TV를 앞서 들였다. 세 살 터울인 작은형과 나는 학교를 마치자마자 들녘으로 뛰어나가 페인트깡통 가득 개구리와 미꾸라지를 채웠다. 김일의 레슬링이 있는 날이면 시간에 쫓겨 안달이 났다. 신작로건너 대높은집은 아이들이 들고 온 깡통을 검사하고 안마당에 들였다. 보다 못한 어머니가 서울 이문동의 연탄공장에 다니던 외삼촌께 부탁했다. 우리집 TV는 삼성 이코노로 다리 네 개에 미닫이 문짝을 단 웬만한 장롱 크기였다.

2부 ‘시인 유보씨의 하루’는 시인・영화감독의 시각으로 본 작업실 가는 풍경. 80년대 말 출간된 시인의 첫시집 『무림일기』는 무협지, 만화, 만화영화, 60-70년대의 방화, 포르노물 같은 시인의 성장기에 접했던 음성적 이미지의 대중문화 양식들이 소재. 두 번째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어느 글에서 보았던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영화감독은 〈말죽거리 잔혹사〉의 쌍절곤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시인 함민복을 떠올렸다. 시인의 쌍절곤은 윙 윙 바람 가르는 소리를 냈다. 감독은 와꾸 때문에 포기(?)했을까.

 

당신을 넣어보라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보라 예컨대 나를 포한한 소설가 박상우나 / 시인 함민복 같은 와꾸로는 곤란하다 넣자마자 띠― 소리와 함께(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中에서)

 

그리고 성윤석・허수경・진이정・함민복 시집에 대한 서평을 실었다. 3부 ‘어떤 취향’은 장이모 감독의 〈붉은 수수밭〉, 서극 감독의 〈황비홍 3〉, 소더버그 감독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폴 버호벤 감독의 〈토탈리콜〉 & TV드라마〈서울의 달〉에 대한 단평. 그리고 재즈에 대한 전문가적 리뷰가 돋보였다. 시인에게 있어 jazz는 인간이 지닌 희로애락을 원형 그대로 생생하게 선율화내는 음악이었다. 테너 색스폰의 아버지 콜맨 호킨스, 테너 색스폰의 양대 산맥 레스터 영, 재즈 피아노의 천재 아트 데이텀, 저주받은 천재 예술가 찰리 파커, 전통적 즉흥 연주에 충실한 뮤지션 소니 롤린스, 최초의 백인 알토 색스폰 주자 아트 페퍼, 백인 중산층의 정서에 가장 부합하는 뮤지션 쳇 베이커, 집시 뮤지션 장고 라인하르트와 함께 했던 지난날을 추억하는 바이올리니스트 스테판 그라펠리의 앨범, 당대 최고의 트럼펫 주자 윈턴 마샬리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에 나오는 곡들의 연주를 모아 사운드트랙 형식으로 제작된 소설음악 클로드 윌리엄슨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까지. 80년대 말부터 90년대까지 시인으로, 2000년대는 영화감독으로 살아온 유하는 이렇게 말했다. “난 제대로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시를 쓸 것이며, 제대로 시를 쓰기 위해 영화를 만들 것”(56-57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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