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壬寅年 김장을 마친 텃밭이다. 어머니가 퇴원하시고 올 마지막 농사는 김장 담그기와 마늘・양파 파종만 남았다. 다행스럽게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운신할 수 있는 기력을 회복하셨다. 이제부터 살림살이는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 작은 형은 공장 사정으로 시간을 낼 수 없어 주말의 김장 날짜를 확정짓지 못해 불안해했다. 나는 우리끼리 김장을 하자고 용기를 내었다. 지난 주말은 온 섬의 집집마다 김장을 담그느라 자식들이 고향을 찾았다.
나는 김장 준비로 삼일을 잡았다. 왕초보의 막무가내 김장담그기 도전이었다. 어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이것저것 천둥벌거숭이 막내아들을 이끌었다. 우선 쪽파 반 두둑을 뽑고, 짠지를 담갔다. 올해 배추가 보잘 것 없는 반면 무 농사는 섬에 정착한 이래 가장 대풍이었다. 어머니가 한 여름에 솎은 줄을 따라 애기 머리통만한 무들이 가지런했다. 수세미로 무를 닦아 물기를 제거하고 품에 안기는 항아리 둘에 쟁이고 소금을 충분히 넣었다. 부직포를 씌운 왼쪽 두 두둑은 마늘 종구를 묻었다. 삽으로 흙을 일구고, 토양살충제를 살포했다. 마늘 종구는 벽에 매달린 세 접을 어머니와 봉당 바닥에 주저앉아 일일이 준비했다. 골을 파고 종구를 묻고 나자 해짧은 하루가 저물었다.
다음날 알타리무를 씨알 굵은 놈으로 솎아냈다. 좌충우돌 왕초보가 못미더운 뒷집・감나무집 형수가 짬날 때마다 우리집에 발걸음을 하셨다. 어머니가 다듬은 알타리무를 뒷집 형수가 소금 간을 했다. 우러나는 흙물을 쏟아버리고 헹구는 힘이 필요한 노동은 나의 몫이었다. 배추의 밑동을 도려내고 겉잎을 벗겨냈다. 감나무집 형수가 오셔서 소금 간을 하셨다. 두 형수의 손에 익숙한 김장담그는 요령을 눈에 담는 것이 나의 올해 임무였다. 배추김치 속을 채울 무를 뽑아 수세미로 깨끗이 닦아 물기를 없앴다. 뒷집 형수가 김치가 싱싱하라고 쑥갓을 가져오셨다. 감나무집 형수는 한약재료가 들어간 쑨 풀이 남았다고 주셨다. 두 형수가 아니었으면 내가 김장담그기에 어찌 도전할 수 있었을까.
저녁을 먹고 무채를 썰었다. 나는 우격다짐 힘으로 밀어붙였다. 애기 머리통만한 무를 채칼에 기장대로 썰었다. 감나무집 형수가 무채에 소금 간을 하시며 웃으셨다. 이렇게 긴 무채는 처음 보겠다고. 어쨌든 땀을 흘리며 무채를 써는 나의 막가파식 노동으로 빠른 시간에 끝마쳤다. 이제 배추속을 버무려야겠다. 어머니가 지팡이를 짚은 채 마늘, 생강을 내가 뒤집는 대로 골고루 넣으셨다. 어머니는 한달 전부터 김장용 양념을 준비하셨다. 나는 큰 함박의 무채에 중하, 새우젓, 쑥갓, 소금, 쑨 풀을 구슬땀을 흘리며 버무렸다. 김장담그기에서 가장 힘이 드는 노동이었다. 어머니와 나는 일에 지쳐 초저녁에 곯아 떨어졌다.
김장담그는 날은 우중충했다. 일기예보대로라면 오후부터 제법 많은 양의 비가 내릴 것이다. 하늘은 어두운 얼굴로 낮게 가라앉았다. 어둠이 가시기도 전에 감나무집 형수가 달려왔다. 배추는 씻은 것이 아니라 너무 짤까봐 밤에 건져놓은 것이라고. 아! 우리 모자가 잠든 사이에 이웃집 형수는 김장김치가 짤까봐서 밤중에 일을 해치운 것이다. 나는 형수에게 배운대로 세 함박에 물을 가득 채웠다. 어머니가 반으로 쪼갠 배추를 집어주면 차례대로 함박의 물에 헹구어 구멍 숭숭 뚫린 평상에 일렬로 널었다. 배추의 물기를 빼는 일치레였다. 살꾸지항 첫배를 타고 작은 형네 가족이 도착했다. 전화도 없이 이모와 이종사촌이 함께 나타났다.
작은 형께 부탁한 귤 두 박스를 이웃집 형수 두 분께 드렸다. 김장 왕초보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은공에 대한 작은 보답이었다. 작은 형과 어머니는 배추속을 싸시고, 나는 텃밭의 남은 알타리와 무, 배추를 거두었다. 날이 사나워졌고, 배가 뜰까 걱정이 앞섰다. 점심배로 섬을 떠나는 이모 차편에 새우젓과 땅콩, 무 두 포대, 알타리 두 포대, 이웃집에서 얻은 고구마 한 박스를 실어드렸다. 바람이 불면서 빗줄기가 세차졌다. 작은 형 차편에 김장김치통과 무 두 포대, 알타리김치 두 통을 실었다. 다행히 저녁배가 강화도에서 건너왔다. 텃밭에는 우거지용 배추 대여섯 포기만 남았다. 뭍에 출타하면 양파모종 두판을 사야겠다. 이제 양파만 심으면 올 농사도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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