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되새김질하다

예수전

대빈창 2010. 12. 24. 03:17

 

 

책이름 : 예수전

지은이 : 김규항

펴낸곳 : 돌베개

 

서도면은 1읍12면으로 이루어진 강화군의 막내 면이라 할수 있다. 본도인 강화도에서 서도를 찾으려면 외포리에서 카페리호로 1시간30분이나 걸린다. 피서철 성수기를 제하면 배편은 하루 2번 밖에 없다. 그것도 바람이 세거나 안개가 자욱하면 여객선 운항 두절로 섬은 고립된다. 행정구역 서도면은 4개의 유인도와 9개의 무인도 구성되었다. 주민수는 대략 700명이 안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4개의 섬에 모두 5개의 교회가 들어섰다. 면소재지인 주문도는 주민이 300여명이 조금 넘는데 교회가 2개나 된다. 주민수에 대한 신도율은 90%에 육박한다. 전국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힐 정도다. 나이드신 신자분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우리 서도면 의 교회 역사가 오래인 것을 반증한다고. 일면은 맞는 소리다. 주문도에는 시 유형문화재 7호로 지정된 서도중앙교회가 현존한다. 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건축물의 외형은 전통적인 조선 기와집인데, 교회 내부는 바실리카 건축양식으로 개신교 전래 초창기에 지어진 한옥 예배당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섬 주민의 노령화가 교회 신도율의 증가로 보인다. 서도면의 유권자는 놀랍게도 91%을 넘어선다. 쉽게 말해서 미성년자를 눈뜨고 찾아보기 어려운 섬마을인 것이다. 초중고교가 한 학교로 뭉쳐 있는데, 년초가 되면 학교 존립 문제부터 불거진다. 학생수가 목사, 선생, 영내거주 군인 가족수에 따라 널뛰기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식구가 많이 딸린 외지인이 섬으로 부임하길 내심 바랄수밖에 없다. 섬이라 하지만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한다. 바다의 고기는 씨가 말라, 어선은 몇 척 없다. 섬마다 대여섯의 농군이 기계화된 영농으로 벼농사를 짖는다. 척박한 바다 환경으로 많은 수의 주민을 부양할 수 없는 것이 섬의 현실이다. 또한 고기잡이와 농업으로 이 땅에서 목구멍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을까. 당연히 젊은이들은 대처로 사리 때의 물살처럼 쏜살같이 빠져 나갔다. 빠져나간 물살에 고개를 내민 여처럼 몇 명의 농사꾼이 섬의 들녘을 도지맡아 농사를 지을수밖에 없는 것이다. 섬의 가구수 주민은 대략 1.5명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뭍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환경이 공동체를 살아남게 만들었다. 홀로 된 노인들의 사랑방 공동체 모임을 교회가 대신 하는 것으로 내게는 생각된다. 그래서 도회지의 기업화된 대형교회에 가자미 눈을 뜨는 나도 섬의 교회를 보는 시야에 따듯한 기운이 서린다.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나이드신 주민들은 밭농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환금작물로 속노랑고구마와 고추를 재배한다. 고추는 밭작물 중 손이 많이 타는 작물이다. 묘를 이식하는 봄부터 끝물을 수확하는 가을까지 주민들은 땡볕 쏟아지는 밭에서 보낸다. 하지만 가을에 손에 만져지는 소득이란 것이 도시인들의 껌값 수준밖에 더 되는가. 주민들은 가난하지만 정직하다. 어느 시인처럼 돈을 쓰지않는 생활을 하면 많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섬생활이란 것이. 더욱 고마운 것은 마을 주민들은 한식구처럼 정을 나눈다는 사실이다. 작은 먹을거리라도 꼭 나누어 먹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살아있기에 그나마 일흔을 넘긴 독거노인들이 고향에서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종이 울린다. 골다공증과 무릎관절이 불편한 다리를 질질 끌며 하나둘 노인네들이 교회를 오르는 언덕에 모습을 드러낸다. 손길에 닳고닳은 가죽피를 입힌 성경을 소중하게 가슴에 품은 채.

책 장정에 섬세한 손길이 느껴진다. 위 책 이미지에서 노란 겉 표지를 벗기면 파란 속표지가 나온다. 파란 천으로 감싼 속표지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표제의 자음과 모음이 어긋나 있다. 돌베개에서 출간된 저자 김규항의 또다른 책 '나는 왜 불온한가'와 같은 글꼴이다. 표제 "예수전'을 칼로 도려내어 속표지의 파란 바탕이 글자색으로 드러난 것이다. 살아생전 내가 복음서에 손을 댈 줄은 몰랐다. 그만큼 나의 삶은 교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초등학교 시절, 성탄절에 과자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몇 번 발걸음을 한 것이 고작이다. 한때 노스트라다무스의 종말론적 예언에 대한 신비주의적 관심으로 성경에서 '요한 묵시록'을 들썩인 것이 한 때의 관심이었다면 관심이었다. 신약성서의 맨앞 네 권(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을 복음서라고 부른다.  여기서 저자는 가장 먼저 쓰여서 종교적 첨가가 적어, 예수의 인간적 모습을 그릴 수 있는 '마르코 복음'을 택해 예수의 행적을 되살린다. 마르코 복음이 빨간 글씨로 본문을 이루고, 저자의 해설이 검은 글씨로 뒤를 따르는 형식이다. 저자는 2,000년전 로마제국에 대항한 팔레스타인 인민의 편에 서서 지배세력에 저항한 예수를 복원시킨다. 그러기에 교리로 덧칠되지 않은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되살려내고 있다. 이같은 예수의 해석은 거대한 자본과 기득권을 향유하는 한국교회가 믿는 예수와 정면으로 대립된다. 반공·친미정권에 빌붙어 세력을 키워 보수화한 한국교회는 수구꼴통 세력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도착적 전도 행태와 마몬(물질적 부)을 실질적으로 숭배하는 한국 교회는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와 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가진 자들만의 '악의 구조'이기 때문이다. 막말로 기득권과 자본의 힘으로 예수를 팔아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는 오늘날 이 땅의 보수 개신교 교회는 예수를 따르는 신앙인이 아닌 '독사의 새끼들'인 것이다. 그러기에 이 땅의 예수는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가난한 자들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이다.

'책을 되새김질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아 있는 지구  (0) 2011.01.04
말과 사람  (0) 2010.12.27
배명훈 소설 두 권  (0) 2010.12.13
숲 생태학 강의  (0) 2010.12.07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0) 2010.1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