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누가 봐도 연애소설
지은이 : 이기호
펴낸곳 : 위즈덤하우스
소설가는 1999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공모에 단편소설 「버니」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앞날개 이력을 보니 작가는 그동안 짧은 소설 2권, 소설집 4권, 장편소설 3권을 펴냈다. 나는 소설집 『갈팡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문학동네, 2006)로 작가를 처음 만났다. 그리고 소설가의 재기발랄한 재미있는 소설에 빨려들었다. 소설가가 펴낸 모든 책을 섭렵했다. 『누가 봐도 연애소설』은 콩트에 가까운 원고지 20매 분량의 작품들 30편이 실렸다.
퇴직후 육아를 전담하는 남자의 녹색어머니회 봉사활동에서 만난 첫 사랑. 편의점 전자렌지에 지폐를 숨기는 터미널에서 길을 잃은 치매남편. 계층차가 뚜렷한 사귄 지 300일 된 초등학교 6학년 커플. 유통기한이 다된 삼각김밥을 먹는 편의점 알바에게 손김밥을 건네는 김밥집 노총각. 보름 전 연인의 결별선언에 자살하려 5층 고시원 옥상 철제 난간에 매달린 마음여린 남자. 초등학교 첫사랑과 영화 데이트에서 인터넷 판매용 영화촬영하는 사람과 시비가 붙은 남자. 부부싸움을 하면 40여 년을 한결같이 집을 나와 짧은 별거에 들어가는 아버지.
반 년 만에 만난 헤어진 여자를 희희낙락 따라가는 반려견에 대한 배신감. 백수의 좋아하는 대학동기와 데이트자금으로 쓴 긴급재난지원금. 술 취한 승객의 연애 실랑이에 휘말린 운영하는 회사 부도로 이혼한 택시운전 기사.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독감에 걸리자 따라서 감기에 걸리려 마스크를 집어간 초등학생 남자 아이. 애견과 호수공원을 산책하는 여자와 인연을 맺으며 애견을 분양했으나 오히려 개로 인해 여자를 타박하는 남자. 탐탁치않은 딸의 호주인 남친과의 여수가족여행에서 오히려 도움을 받는 고소공포증 남자. 활자중독자 교수의 지식에 의존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맺기.
사내 비밀연애 중인 사회초년생의 어설픈 발연기. 땅콩카라멜콘의 땅콩 개수를 세는 남자․1+1에 중독된 여자, 사업파트너의 이삿짐 꾸리는 것을 도와주러 나선 연구소 직원들의 모두 다른 생각. 헤어지는 여친의 영국 유학길 배웅에서 연착되는 비행기가 쌓인 눈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 남자. 배달치킨을 맛있게 먹는 여자가 반년 만에 먼저 떠난 구도심 단층 단독주택의 마지막 셋방 남자. 함께 찍은 사진의 배경화면이 윈도우 파란 하늘로 바뀐 헤어진 여친에게 돌려받은 노트북. 마음에 두고 있던 남자와의 지방출장길, 지독한 정체와 고장난 에어컨에 대처하는 그의 행동에 마음이 닫힌 여자. 빌라의 위 아래층에 사는 홀로된 어머니와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 딸들의 쪽지 왕래.
헤어진 여자가 찾아와 마음을 추스르는 사업부도로 남도의 한 절에 들어와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던 남자. 이혼하고 고향에 내려온 초등학생 때 짝사랑하던 여자를 감싸면서 사랑하게 된 노총각. SNS로 대화만 하던 남자를 1년 만에 만났으나, 항암치료하는 아버지의 냄새를 맡고 다음 약속을 계속 미루는 여자. 어릴 때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한 아빠의 뒤늦게 찾아온 짝사랑 상대는 수학학원 부원장. 2박3일 제주도 가족여행에 동행한 어머니의 풀세트 외국산 구체관절 인형 니콜라스 장군. 버스정류장에서 엿기름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날벌레를 피하려 자동차대리점에 들어섰다가 빠듯한 살림에 뜬금없이 할부 자동차 계약을 맺은 한과공장에 다니는 남자.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닥까지 추락한 사랑할 여력도 없는 사람들이지만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뭔가 결핍된 인물들이 힘들고 초라한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고 있었다. 작가는 말했다. “그것이 삶이라고, 누가 뭐래도 사랑이라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소설가를 “2000년대 문학이 선사한 가장 ‘개념 있는’ 유쾌함”이라고 평했다. 상처받은 사람들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낼 수 있다니. 나는 마지막 책장을 덮고, 도서관 대여목록의 맨 윗줄에 작가의 짧은 소설 『눈감지 마라』(마음산책, 2022)를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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