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암실 이야기
지은이 : 귄터 그라스
옮긴이 : 정희창
펴낸곳 : 민음사
귄터 그라스(Gǖnter Grass, 1929-2015)는 ‘행동하는 지성인’ 또는 ‘비판적인 지성인’으로 불렸다. 그의 대표작은 누가 뭐래도 『양철북』(59년)이다. 난쟁이 주인공 오스카 마체라트에 의한 1920년대-50년대까지의 일그러진 독일 역사를 그렸다. 돌이켜보니 단편적인 기억은 오래전 보았던 영화 장면의 파편들이었다. 독서목록에서 외국소설을 기피했던 나의 한계였다. 쇨렌도르프 감독에 의해 1979년 영화화되어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환갑을 넘기며 능력이 따라줄지 의문이지만 자전소설을 생각했다. 그리고 존경하는 작가 현기영의 『지상에 숟가락 하나』를 떠올렸다. 그때 온라인서적을 서핑하다, ‘귄터 그라스 자전 소설’이라는 문구를 보고 책을 손에 넣었다. 아마! 『양철북』을 아직 잡지 못했다는 자기 부끄러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떠오른 생각은 잘못 골랐다는 후회였다. 나는 여적 덤벙거리고 있었다. 출판사 〈민음사〉는 귄터 그라스가 말년에 낸 책을 잇달아 출간했다. 2002년에 발표한 소설 『게걸음으로』, 2006년에 낸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 2008년에 펴낸 자전소설 『암실 이야기』 였다. 차라리 자서전을 읽을 것을.
『게걸음으로』는 1945년 구스틀로호프 침몰사건을 다루었다. 독일 피난민 9천여 명이 타고 있던 배는 소련 어뢰 세 발에 침몰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과 어린이로 살아남은 사람은 고작 1천명이었다.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는 작가의 나치 친위대 복무 사실을 고백해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17세 고등학생이었던 작가는 히틀러의 나치친위대에 징집되어 복무한 사실을 상세하게 기록했다. 당시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작가는 스스로 잘못을 고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간헐적으로 사태를 알아차렸고, 수시로 멈칫거리며 고백했다. 무지해서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나는 범죄에 가담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작아지지 않고, 앞으로도 없어지려 하지 않을 것이며, 지금까지도 그 때문에 내가 병을 앓고 있는 범죄였다.”
『암실 이야기』는 소설 형식에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퀸터 그라스는 두 번의 정식 결혼과 두 명의 여자 친구로부터 여덟 명의 자식을 두었다. 소설 집필에 전념했던 그가 아이들에게 시간을 내주지 못했던 아버지의 회한을 작품 속에서 풀었다. 소설의 원제는 『Die Box』로 평생 아버지 곁에서 가족의 일상을 포착했던 마리 아주머니의 박스 사진기를 가리켰다. 헌사가 ‘마리아 라마를 추억하며’ 이었다. 그는 1950년 중반 작가의 여러 작품의 소재와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실존 인물이었다.
아이들은 실제 이름과는 다르게 불리지만 성인이 된 아이들이 아홉 번이나 식탁에 모여 어릴 적 회상을 기탄없이 발언하고, 때대로 작가도 화자로 개입한다. 마리 아주머니의 아그파 박스라고 불리는 박스 사진기는 전쟁 속에서 살아남아 모든 것을 투시하면서 아주 특별한 사진들을 현상했다. “나의 박스는 하느님과 같아, 지금 존재하고, 옛날에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하게 될 모든 걸 볼 수 있으니까.”
“우리 아버지가 짧은 바지를 입고 입단했던 나치 청소년단 단장의 이름을 따 ‘발두르’라고 불렸지.······. 파시스트 청소년들을 위한 특별 제품이었지.”(49쪽) 작가가 자선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에서 고백했던 사실을, 아이의 입을 통해 발설한 구절이다. 가족의 과거사에 대한 회상을 아이들에게 맡겨 객관성을 확보하는 실험적인 소설이었다. 단순한 내가 이해하기에 버거웠다. 차라리 현기영의 자전소설을 한 번 더 잡을 것을. 그렇다면 작가의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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