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밖에서 본 한국史
지은이 : 김기협
펴낸곳 : 돌베개
역사학자 김기협(1950- )의 책을 두 번째 잡았다. 최근작 『오랑캐의 역사』를 읽고, 군립도서관의 저자의 책을 검색했다. 반갑게 세권이 올라왔다. 『뉴라이트 비판』,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 『밖에서 본 한국사』. 내가 잡은 책은 2008. 3. 31. 초판1쇄였다. 합리적 보수주의자의 ‘밖’에서 보는 한국사韓國史는 배타적․독선적 국수주의를 배제했다.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이념적 논박으로부터, 절대적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시야를 강조했다.
책의 부제는 ‘김기협의 역사 에세이’였다. 한민족의 공간 한반도에서, 근대국민국가에서 세계정부로 나아가는 길까지 7부 37편의 글을 담았다. 한국 국적의 사람이 미국의 이익을 앞세워 생각하고, 일본 국적의 사람이 한민족의 장래를 먼저 생각하는, ‘국사’보다 ‘민족사’가 필요한 상황의 전개. 한반도의 많은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 시대의 초기에는 수입 청동기를 쓰는 단계가 수백 년간 지속. 단군신화의 의미는 청동기 문명의 전래와 함께 부족 단위의 토템 신앙이 하늘 숭배로 바뀌면서 청치조직의 규모가 커지는 단계. 기원전 109-108년 한무제의 한사군 설치는 흉노의 위협을 가라앉힌 후의 예방전쟁.
가야연맹 존립의 주요 근거는 낙랑으로부터 전수받은 선진문물을 왜에 전달해주는 역할. 당나라는 8세기 들어 동방의 적극적 경략이 부담스러워지자 735년 패수浿水 이남을 신라 영토로 인정하고 조공-책봉관계 성립. 작은 나라 고려의 1231-1259년까지 근 30년간에 걸친 대몽항쟁은 최씨 정권의 안정성에 비롯. 몽골지배기는 한민족의 정체성에 위협이었지만 문명수준을 높여 적응력이 더 높은 정체성을 빚어내는 기회. 1356년 행동에 나선 공민왕은 원나라의 연호와 관제를 철폐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 탈취한 반란세력의 하나.
과거 청산의 급진개혁파가 이성계를 선택한 것은 당대에 이르러 고려에 편입된 변방호족 세력이었기 때문. 명나라와 조선의 사대관계는 남한의 미국에 대한 종속관계보다 독립성 강한 것 - 임진왜란 시 명나라 군대는 조선에 주둔하지 않음. 조선초 100년간 과거급제자의 15% 이상이 본관조차 없는 서민으로 새로운 계층이 활발하게 관료층에 편입.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정복왕조 몽골의 중국 정복은 60년이 걸렸고, 관내에 거점하나 없었던 청나라의 1638년 중원공격은 6년만에 천하를 넘겨받음-청나라는 명나라의 무너진 공백으로 끌려들어온 셈.
향촌의 생산력 발전이 둔화되면서 여러 파벌이 고정된 진영에 얽매여 항쟁을 벌인 것이 17-18세기 조선을 지배한 당쟁. 1860년대 일본에 독점적 야욕을 가진 열강이 없었던 반면 1880년대 조선에는 일본이 있었다. 1897년의 소위 ‘광무개혁光武改革은 주체 없는 개혁’으로 대한제국은 일본 등 열강이 바라는 이권 개발을 충실이 대행하는 기구. 한국은 독일, 베트남과 두 진영으로 분단, 베트남의 친미정권은 미국의 총력지원에도 냉전 중반에 무너졌고, 독일은 경제와 사회 발전으로 냉전을 극복, 한국은 세계적 냉전 구조가 해소된 후에도 냉전체제 유지.
1948년 남한에 세워진 이승만 정권은 국가발전을 위한 노력대신 권력투쟁에 매달린 기회주의 정권-반미특위 탄압, 보도연맹 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절실한 현금 마련으로 식민지 시대의 피해 보상금을 헐값에 흥정. 박정희 군사정권은 비밀경찰 중앙정보부로 고도의 사회통제- 특히 1970-79년 유신시대의 남한은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과 함께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전제주의 사회의 하나. 유럽의 산업혁명에서 시작된 오늘의 세계화는 인류역사상 유례없는 거대한 변화에 따른 부작용은 인류의 파멸 우려.
저자의 역사 서술은 동아시아 세계사의 흐름을 살피면서 역사의 물적 조건에 방점을 찍는 넓은 시야의 한국사를 객관적이고 포괄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이 땅의 민족사관은 식민사관에 억눌려왔던 민족 주체성을 선양하여 억압자의 관점을 방향만 뒤집고 틀은 그대로 본 뜬 것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우리 민족의 뛰어남을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미성숙한 역사인식이었다. “제국주의의 억압을 받던 시절에 민족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노력에는 자위自衛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해방 후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자기중심적 사고에 머물러있는 것은 자위自慰일 뿐이다.”(3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