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빈창을 아시는가

루저 기러기 가족

대빈창 2023. 4. 3. 07:00

 

만우절이 엊그제였습니다. 위의 이미지는 한주일전에 산책에 나섰다가 잡은 컷입니다. 거짓말처럼 기러기 한 가족 일곱 마리가 대빈창 다랑구지 들녘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 루저loser 가족처럼 보였습니다. 도대체 녀석들은 제 갈 길을 못가고 여적 서해의 작은 외딴 섬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논을 쓸리기 위해 지하수를 퍼 올리는 논배미에서 녀석들은 물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나치기를 기다리며 숨을 멈추었던 놈들은, 주머니에서 손전화를 꺼내들자 덩치 큰 놈이 먼저 날개짓을 했습니다.

위험하니 피하라!는 신호 같았습니다. 일가족이 허공에 떠올랐습니다. 기러기들은 정확히 주문도의 벼베기 때를 알고 있었습니다. 지난 늦가을 여섯 마리가 먼저 눈에 뜨이더니, 벼베기를 마친 필지마다 기러기떼가 새까맣게 앉았습니다. 기러기들은 비행을 할 때도 위아래를 지킨다고 합니다. V자 편대는 에너지를 아끼려는 방편입니다. 앞의 기러기 날개짓에 소용돌이 기류가 형성되고, 뒷 기러기는 상승기류를 탑니다. 맨 앞의 한 마리 기러기를 제외하고 뒤를 따라오는 기러기들은 조금이라도 힘을 아낄 수 있었습니다.

작년 가을 주문도 들녘은 경쟁적으로 가을갈이를 했습니다. 콤바인에서 떨어진 알곡이 땅에 묻혔습니다. 볏짚환원사업 보조금이 집행되면서 농부들은 일찌감치 수확한 볏짚을 땅속에 되돌려주었습니다. 기러기들에게 때 아닌 식량난이 닥쳤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폭우가 쏟아졌고, 수은주가 떨어져 맹추위가 찾아왔습니다. 기러기들은 봉구산자락 밭의 수확하고 남은 잔챙이 고구마나 마른 고춧대에 매달린 고추에 입을 대었습니다. 속이 허한 기러기들이 모진 추위를 이겨내려는 모습이 안쓰럽게 보였습니다.

기러기들의 번식지는 광활한 툰드라 하천의 섬이나, 소택지의 늪 주변입니다. 바람결에 봄기운이 묻어오면 녀석들은 언제 갔는지 모르게 다랑구지 들녘에서 하나둘 떠나 어느 틈에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꽃샘추위도 지나가고, 생강나무의 파스텔톤 노랑이 낮은 둔덕을 뒤덮었습니다. 저마다 새잎을 가지마다 올리는 나무들의 부산스러움으로 봉구산이 물들어갔습니다.

동료들이 자기 고향으로 모두 돌아갔습니다. 일곱 마리의 기러기 가족은 왜 여적 꾸물거리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루저(loser, 낙오자)일까요. 강원 영월 동강의 비오리처럼 철새에서 텃새로 진화하고 있는 중일까요. 아니면 겨우내 제대로 먹지못해 먼길을 떠나는 에너지가 부족하여 뒤떨어진 것일까요. 기러기들은 가족의 우애가 대단하다고 합니다. 다친 가족을 위해 다 나을때까지 아직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녀석들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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