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름 : 유럽도시기행 2
지은이 : 유시민
펴낸곳 : 생각의길
유시민의 『유럽 도시 기행』이 3년 만에 돌아왔다. 2019년 7월에 펴낸 첫째 권은 유럽의 문화수도였던 아테네, 로마, 이스탄불, 파리를 여행했다. 2022년 7월에 나온 둘째 권은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드레스덴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네 개의 도시였다. 도시의 핫플레이스, 건축물, 도로, 광장, 박물관과 미술관에서. 도시를 만들어낸 세계사적 인물과 사건에서. 유럽의 역사와 도시가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서사와 상흔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1권 표지그림은 네 도시의 대표 건물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로마의 콜로세오,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파리의 에펠탑이다. 2권의 표지그림은 빈의 시씨왕후, 부다페스트의 언드라시 백작, 프라하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 드레스덴은 내세울만한 인물이 없어 랜드 마크 1번 성모교회였다. 작가는 말했다. “도시의 건축물․박물관․길․광장․공원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석하는데 필요한 ‘콘텍스트(context)'를 전달하는데 주력했다”고.
프란츠 요제프(Franz Joseph, 1830-1916) 황제는 군사적 가치를 상실한 대성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길을 냈다. 엄청난 건설 붐은 19세기 후반 유럽 최고 수준의 건설 기준과 공적 자금․민간 자본이 쏟아져 들어왔다. 링 주변의 건축양식은 제 각각으로 ‘비엔나스타일’ 또는 ‘링 양식’이라고 한다. 시씨(Sissi, 1837-1898)) 왕후는 요제프 황제의 부인으로 엘리자베스 폰 비텔스바흐의 애칭이다. 시씨는 황후의 권력과 화려한 궁정 생활에서 의미와 행복을 찾지 못해 여행자의 삶을 추구하며 ‘자기다운 삶’을 찾았다. 그녀의 생애는 상실과 고통과 외로움으로 얼룩졌고 참혹한 비극으로 끝났다.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유럽 지배계급 전체를 통틀어 첫 손가락에 꼽히는 유능한 권력자였다. 합스부르크 제국이 그 뒤로도 140년이나 존손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힘이었다. 훈데르바서(Hundertwasser, 1928-2000)는 건축가, 화가, 자연주의 철학자였다. 훈데르바서 하우스는 시정부가 지은 공영주택으로 외벽에 3원색을 칠했고, 직선이 없다. 인간이 만든 직선을 버리고, 자연의 곡선에 녹아들도록 했다. 빈은 책에 비유하면 유명한 인문학 고전과 비슷하다. 명성 높은 인문학 고전은 모르면 교양인이 아닌 것 같아서 읽는 경우가 많다. 약점이라고는 잡아낼 수 없는, 부러워하거나 시샘할 수 있지만 흉보기는 어려웠다.
헝가리 사람들은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 ‘머저르(mager)족’의 후손이다.서기 896년 무렵 부다페스트 도나우 우안(서쪽) 언덕을 점령한 선조는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이 사는 유럽 한가운데 뛰어든 형국이었다. 리스트(Liszt Ferenc, 1811-1886)는 피아니스트․작곡가로 〈헝가리 광시곡〉을 비롯해 700곡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그는 빈, 파리, 런던, 로마 등 유럽 전역의 여러 도시에 장기 거주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섭렵한 ‘유럽인’이었다. 개혁파 정치인 너지 임레(Nagy Imre, 1896-1958)는 헝가리 총리로 1953년 스탈린이 죽자, 자주노선을 표방하여 서방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식량부족으로 신음하는 현실을 보고 정책노선의 전환을 결심했다. 부다페스트는 스스로를 믿으며 시련을 이겨내고, 가고자하는 곳으로 꿋꿋하게 나아가는 사람 같았다. 부다페스트는 슬프면서 명랑한 도시였다. 별로 가진 게 없는데도 대단한 자신감을 내뿜었다.
프라하는 밝고 예뻤다. 걱정 없는 소년 같았다. 여행자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종교개혁가 얀 후스(Jan Hus, 1372-1415)는 보헤미아 민족주의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대변했다. 그는 로마교황청의 라틴어를 쓰라는 지침을 무시하고 체코말로 설교했다. 믿음의 근거를 교회가 아닌 성서에서 찾아야한다고 주장했다. 교회와 사제들의 범죄행위와 부정부패를 가차없이 비판했다. 그는 신념을 버리지 않은 죄로 고문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는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고독과 불운에 짓눌렸다. 그의 작품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고, 팔리지도 않았다. 빈 근교의 요양원에서 외롭게 죽었다. 절친 막스 브로도가 카프카의 글을 출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프라하는 역사의 상처를 감추지 않았고, 그 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독일연방공화국은 열여섯 개 주가 있고, 작센 주 수도 드레스덴은 열두번 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였다. 영국과 미국 공군은 1945년 2월 13일 밤부터 사흘동안 네 차례 연달아 드레스덴을 융단폭격했다. 고열의 화염폭풍이 도심 반경 3㎞ 이내의 모든 것을 불태웠다. 성모교회(Frauenkirche)는 1천도 열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시커먼 돌무더기만 남았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기부금을 통한 복원은 첨단 건축을 이용한 재건축이었다. 2005년 2월13일 성모교회는 공식 부활했다. 6만 여명의 시민이 모여, 60년 전 그날의 폭격희생자 추모 행사를 열었다.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던 폐허가 시민의 자유와 독일의 통일을 상징하는 교회로 다시 태어났다.